부도유예마감일인 29일을 앞두고 기아가 화의를 신청했다.

우리경제는 싫든 좋든 기아의 볼모가 돼있다.

기아가 망하면 금융산업이 운명을 같이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경제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이제는 그 원죄의 소재를 따지는 것조차 진부한 일이 돼버렸다.

더욱 기막힌 것은 기아문제가 기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자동차산업 전반에 대한 구조조정을 서두르지 않는 한 우리경제는
기아에서 비롯된 것보다 더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뒤늦게 뛰어든 삼성은 원가부담에 시달리고 있을 뿐 아니라 쌍용 대우
현대 등도 내외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이제는 돌파구를 찾아야 할 때다.

호랑이 굴에서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 주변을 둘러 싸고 있는 여건들을 점검해보면 뭔가 돌파구가 있을 것
같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중국이라는 변수다.

중국 자동차시장은 동구 인도 남미와 더불어 지구촌에 남아있는 흔치 않은
잠재시장이다.

서구 자동차 회사들이라고 이를 모를리 없다.

이들이 중국에서 이것저것 해보려 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러나 만사 호락호락하지 않다.

중국인들이야말로 다루기 어려운 상인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들로선 대안을 찾지 않을 수 없다.

때맞춰 한국 자동차회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있는 전략적 위치야 말로 한국 자동차회사들의
매력이다.

시설도 그만하면 최고다.

중국의 열악한 시설에 비할 바 아니다.

기술도 그럭저럭 괜찮다.

불필요한 인력제거 등 한국인들이 등한시한 몇가지 구조조정만 제대로
하면 극동시장전략상 한국 자동차공장들이야 말로 안성맞춤이다.

시너지효과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마음고생하느니 한국회사중 하나를 인수하여 한반도에 터를 잡고
극동시장을 공략해보자는 속셈이다.

일본과 한국 자체시장 또한 적지 않은 시장이기도 하다.

실제로 서구 자동차의 대명사인 벤츠는 독일 본사에서 오는 10월6일
이사회를 연다.

쌍용자동차 인수여부에 대한 중대 결정을 내릴 예정이다.

쌍용으로서도 싫지 않다.

마이너스 매각대금이 문제지만 쌍용으로선 우선 어려움을 넘기고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나서고 있는 상태다.

미국회사들 또한 극동시장공략에 골몰하기는 마찬가지.

포드는 이미 기아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

일본 경차시장에 관심을 가져온 포드가 아시아자동차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추측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주변형국만 잘 활용할 수 있다면 산소호흡기적 기능에 불과한 화의도
그 당위론이 성립될 수 있다.

외국인들에게 회사를 넘겨주는 것이 무슨 대안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냉철한 이성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일석삼조
하는 묘수일수도 있다.

일제의 혹독한 학정을 잊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사고가 비정상적으로
국수적이거나 피해의식에 젖어 있는 것 아닌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세계는 바뀌고 있다.

버거킹은 맥도널드와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패스트 푸드의 양대산맥이다.

흔히 미국 기업으로 연상되는 버거킹이 실제로는 영국인들 소유의 기업이라
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노벨은 스웨덴을 상징하는 화학그룹이다.

그러나 이 회사도 악조라는 네덜란드 화학그룹이 인수하여 그 이름마저
악조노벨이 된지 오래다.

경제에 관한한 국경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했다.

우리도 세계 각국에 나가 우리가 소유한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터키에서는 현대가, 폴란드에서는 대우가 자동차회사를 세워 환영을 받고
있다.

우리는 상대방 국가에서 자동차회사를 소유경영하면서 남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소유경영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은 상호주의에 어긋난다.

장사가 오래 지속되려면 거래 쌍방간이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있어야 한다.

받는 것만 챙기고 주는 것에 인색한 곳에는 거래가 지속될 수 없다.

국제화는 남의 입장을 고려할줄 아는 열린 마음이 갖추어질 때만 그 진정한
의미가 성립된다.

이제 여건마련은 정부의 몫이다.

외국인이 2조원이상 규모의 회사를 인수할 때는 외자도입법상 정부가
허가권을 가지고 있다.

"25%이상 50%+1주"의 지분확보를 시도할 때는 공개매수를 해야 한다는
증권시장 규정 또한 외국인들에겐 걸림돌이다.

외국인의 토지허가취득 또한 원활한 인수시장여건 조성의 장애요인이다.

인수시장이 외국인에게만 열려있어도 곤란하다.

인수자가 내국인일 경우 총액출자한도 예외인정 또한 필요한 조치중 하나다

한마디로 기아와 쌍용 등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에게 기회가 열려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M&A(인수-합병)
시장의 규제가 철폐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규제완화"가 요즈음 우리사회의 화두가 돼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