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사태의 해결을 위한 정부의 지원여부를 놓고 WTO협정이 중요한 걸림돌
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지원의 타당성과는 별도로 작금의 논의는 WTO가 국내정책에 대하여
갖는 제약효과를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

WTO와 같은 국제통상규범은 어떠한 이념적 도덕적 표상도 아니다.

각국의 통상정책이 협상을 통하여 만들어낸 행동준칙(Code of Conduct)일
뿐이다.

WTO규범을 준수하는 것 그 자체도 통상정책의 일환이다.

국내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정의 정책수단이 WTO규범과 상호 충돌
한다면 이는 전형적인 정책선택의 문제로 귀착한다.

그리고 선택의 기준은 막연한 "국제질서의 준수"가 아니라 이를 포함한
총체적인 국익(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든)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점에서 기아와 관련하여 거론되고 있는 WTO협정의
구체적 의미도 검토되어야 한다.

WTO 보조금및 상계관세협정의 골자는 정부가 특정산업과 기업에 보조금을
지원함으로써 다른 국가에 피해를 초래하면 그 국가는 적절한 절차에 따라
상응하는 보복조치(상계관세)를 취할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금지보조금을 제외하면 본협정은 보조금 그 자체보다 보조금으로
인하여 여타 회원국의 이익에 불리한 효과가 초래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타 회원국의 이익에 불리한 효과란 다음과 같이 규정되고 있다.

첫째 타국의 국내 산업에 대한 피해를 야기하는 경우, 둘째 여타 회원국의
권리를 무효화 또는 손상하는 경우, 셋째 타국의 이익에 심각한 침해가 있을
경우이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기아지원에 대하여 이의가 제기된다면 세번째 경우,
즉 "여타 회원국의 이익에 대한 심각한 침해"와 관련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따라 정부가 지급보증을 서거나 민간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대출을
강제하는 등의 지원조치는 상계관세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러한 우려는 정부가 기아에 대한 정책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그런데 과연 WTO의 이러한 제약 때문에 필요한 경우에도 정책수단의 사용이
불가능한 것일까.

그 대답을 위해서는 WTO협정의 다음과 같은 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첫째 WTO보조금 협정은 예외조항을 갖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협정 제6조 3항에는 어떤 기업의 영업손실을 보전하기 위한
보조금으로서 장기적 해결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고 "심각한 사회적 문제의
회피"를 위하여 지급되는 비반복적이고 1회적인 조치는 심각한 침해에서
제외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WTO보조금 협정이 특정기업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원을 제약하고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일반적이고 피상적이다.

요체는 기아문제가 과연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인 것이다.

WTO 협정에 입각하더라도 기아문제의 본질적인 성격규정이 정책선택의
출발점임을 알수 있다.

이와관련, 지난 7월 EU 집행위원회가 위의 규정에 근거하여 이탈리아
정부의 Alitalia항공에 대한 15억달러 지원을 승인한 것은 큰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둘째, 보조금 협정은 비교적 명료하지만 해석의 여지가 많은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다.

정책수단의 성격 규정에 있어 관련 국가들간에 논쟁의 여지가 크다.

이는 역설적으로 정책목표의 달성을 위한 수단의 개발에 있어서 정책당국자
로 하여금 창의력의 발휘를 요구한다.

예를들어, 구조조정을 위한 산업합리화 조치, 지방자치단체 재정의 활용,
부품업체에 대한 신용보증기관의 특례보증 확대 등 많은 조치에 대항 보조금
협정이 성격을 분명히 결정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보조금의 지급이 통상마찰로 전개되기까지 통상협상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셋째, 통상마찰이 생기더라도 이에대한 냉정한 손익평가가 필요하다.

통상마찰이 생기면 우리는 극단적인 경우를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특정 국가가 이러이러한 보족조치를 취할 것이므로 커다란 피해가 예상
된다라는 식이다.

그런데 WTO 체제하에서 보족조치는 반드시 분쟁해결절차를 거쳐야 한다.

정부 보조금 문제가 분쟁해결절차에 회부된다 해도 평균 1년6개월이 소요
되는 각종 절차를 거쳐야 하며,이 과정에서 타협의 가능성도 매우 높다.

최악의 경우, 보복이 현실화한다 해도 대체로 그 형태는 우리나라의 특정
수출품에 대한 관세 인상의 형태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인도네시아의 기아에 대한 특혜조치를 두고 일본이 WTO에
제소한 사례는 매우 흥미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GATT 1조(최혜국대우)에 명약관화하게 위반됨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가
기아에 대하여 특혜조치를 강행한 것은 결코 부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인도네시아는 최악의 경우 섬유, 신발 등 일부 주력 수출품에 대한 보복
관세를 감수하더라도 자동차산업의 자립기반을 확보하는 것이 낫다는
정책적 선택을 한 것이다.

더구나 일본은 장래의 시장확보 차질을 우려하고 오히려 제소를 철회하거나
인도네시아와 타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경제적인 이익이 교과적인 규율준수를 앞서는 현실의 적나라한 예가 아닐수
없다.

이상과 같은 논의는 기아에 대한 정부지원의 필요성을 판단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책결정 과정에서 WTO의 제약요인이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어
있음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기아문제의 사회적 경제적 파급효과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기준으로 지원에 대한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 결정 이후, WTO는 구체적인 정책수단의 강구과정에서 검토되어야 할
하나의 변수이며 그 의미도 국익에 미치는 총체적인 효과를 기준으로 판단
되어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