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찬욱과장은 박사과정 1학기를 마친 지난 88년 대우증권에 입사해
처음에는 증권맨으로 영업일선에 뛰었다.

삼성동지점에 근무하면서 종합주가지수가 1,000포인트를 돌파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지만 이후 주가급락으로 "깡통계좌(신용융자로 사들인 주식이
폭락해 처분뒤에도 적자를 내는 계좌)"를 한꺼번에 정리해야 했던 아픔도
함께 겪었다.

기획실로 자리를 옳겨 근무하던 94년 박사과정에 재등록해 2년반만에
통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무척 짧은 기간에 학위를 받았지만 그의 학위논문중 일부가 독일의 통계학
저널에 실리는 등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기도 했다.

요즘도 모든 게임을 비디오로 녹화한 뒤 철저히 분석하는 연구자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스포츠통계학을 하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통계로 작성할 항목들이 야구의
경우 1백40가지가 넘는데 농구는 10여개에 불과하다는 것.

종목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수치에 대한 감각과 끈기가 이런 일을 하는데
필수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 젊은 선수들이 페이스 조절을 못하고 자기관리에 소홀하다"고
지적한다.

용병선수선발을 위해 미국에 가보니 그곳 대학선수들은 프로의식을 갖고
몸관리에 철저하고 성실하단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술 담배도 안하는 순수함을 갖고 있다며 프로의식을
강조한다.

증권맨에서 통계학박사로 변신한 오과장은 미개척분야를 앞서 열어나가는
프론티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