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는 세종19년(1437) 10월 12일로 그 모친 성주 배씨의 대상날이
다가오자 대상 제사에만은 참례하기 위해 휴가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세종은 8월 30일에 다음과 같이 전지를 내려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제 경이 계청하여 이른 바를 보니 "모친이 돌아가는 것도 뵙지 못하고
거상도 법대로 끝내지 못하였으므로 휴가를 청하여 대상의 예를 몸소
치르고자 한다"고 하였다.

이미 경의 지극한 정리를 알았지만 처음부터 국가의 일이 중대하여 부득이
경의 상을 중단시키고 일으켜 썼었는데, 하물며 지금 야인들이 다투어 와서
고변하기를 잡종들이 장차 군사를 일으켜 침략하려 한다고 하니 이렇게
방어가 가장 급한 때이겠으며, 경원의 성 쌓는 일도 이제 막 기공하여
만명의 사람들이 들에 깔려 있으니 이렇게 방수하는데 가장 긴요한
날이겠는가!

경의 모친의 자식이 다만 경뿐만 아니라 형도 있고 누이도 있으니 그 상을
치러낼 것이다.

경은 나라일을 하고 형이 대상을 치른다면 또한 옳지 않겠는가.

예경에 대상을 치르는데 휴가를 준다는 글이 있기는 하나 이는 평시의
일이니 오늘 같은 일에는 비교할 수가 없다.

경도 마땅히 안심하고 진영을 지켜 더욱 위무하고 편안케 하는 계책을
다함으로써 내 뜻을 몸 받도록 하라"

3년동안 거상하는 것도 허락지 않더니 이제 3년상을 탈상하는 대상제사에
참례하는 것조차 허락지 않고 북변을 지키고 다스리라고 한다.

정녕 멸사봉공의 큰 뜻이 없다면 이런 가혹한 왕명에 어찌 원망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해 놓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김종서로 하여금 이런 세종의 가혹한 명령을 오히려 달게
받게 하였으니 김종서는 두말없이 사정을 억제하고 왕명을 받들어 북변을
진무해 나간다.

이에 세종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대상이 지난 10월 20일에 이런 내용의
전지를 내린다.

대상에 참례하는 일뿐만 아니라 자신도 김종서가 보고 싶어 한달쯤 휴가를
주어 올라오게 하고 싶었지만 그 사이 어떤 변고가 일어날지 몰라 허락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울러 북관 수만 백성의 생명이 김종서의 한 몸에 맡겨졌으니 거취를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책임의 막중함을 재확인한다.

그리고 나서 김종서의 품계를 종2품 가정 대부(가정대부)로 높여서 대신의
반열에 들게 한다.

이에 감격한 김종서는 세종20년(1438) 1월 1일에 글을 올려 사례하는데
이때 김종서의 나이는 56세였고 세종의 나이는 42세였다.

현군 세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북변의 절대권자로 군림하면서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흩어져 사는 여진족들까지 제압하여 국경을 백두산과 두만강
까지 확장하는 대공을 세우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이제 품계가 대신의
반열에까지 올랐으니 당시 김종서의 기세가 어떠하였겠는가.

그래서 이런 시조를 지어 불렀다 한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희냐.
어떻다 능연각 상에 뉘얼굴을 그릴꼬.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울고 물결이 높으면 내려가듯이 기세가 절정에 이르면
오래 견디지 못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서 이 해부터는 북변에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이기 시작한다.

김종서가 자신의 후계자로 키워 왔던 경원도호부사 이징옥(?~1453)이 14세
에 맨손으로 호랑이를 사로잡았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체력과 담력을 타고난
무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해 초에 풍증이 생겨 병석에 눕게 되는데
이어서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 양산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에 세종은 3월 1일에 경원도호부사의 직무를 김종서에게 겸직시키며
이징옥도 백일 뒤에 일으켜 보내겠다 하지만 결국 병이 깊어 휴양을 권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니 김종서는 5월 20일에 박이녕을 추천하여 경원도호부사로
삼는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서 김종서의 서울집으로부터 부인 파평 윤씨가 병들어
누웠다는 소식이 전해져 온다.

마침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은 터에 부인의 와병 소식을 듣게 되자
김종서는 북변을 뜰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11월 14일 함길도 도절제사직의
사면을 청하는 사직소를 올린다.

북방의 책임을 맡은 지가 6년이나 되었는데 별로 이루어 놓은 공은 없고
허물만 많이 지어 맡겨준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근심이 병이 되어 점차 먹는 것이 내리지 않게 되어 몸이 몹시
쇠약해졌고 거기다 믿을 것은 못되지만 금년 겨울 이후부터는 자신의 운수가
좋지 못하다고 해서 자신으로 인하여 혹시 변방에 좋지 못한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적임자를 보내어 교체해주면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편안히
보내겠다는 내용이다.

세종이 이 청을 들어줄 리가 없다.

북문의 열쇠를 관리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며 이제 겨우 북방이
안정되어 한시름 놓을 수 있는 것도 김종서의 공로인데 아직 모든 것이
공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임한다는 것은 결코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아내의 간병을 위해 왕명으로 휴가를 주어 상경케 하니 김종서는
세종21년(1439) 1월 23일에 서울로 올라올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김종서의 부인 파평 윤씨는 공주 고향집으로 내려가 병을 조섭하고
있었으므로 김종서는 바로 공주로 내려가서 한동안 간 병하다가 상경하니
세종은 2월 17일에 경복궁 사정전에서 잔치를 베풀어 김종서를 위로하고
안장 갖춘 말 한필을 하사하여 그 노고를 치하한다.

2월 19일 김종서가 함길도 임지로 귀임하기 위해 세종께 하직을 고하자
세종은 병조판서 황보인과 참판 신인손(1384~1445), 도승지 김돈(1385~1440)
에게 명하여 김종서와 함께 변방의 군무를 의논하게 한다.

그때 그들의 의논은 한낮이 되어서야 파하였다고 한다.

이때 김종서는 함길도의 각 고을 수령은 한갓 방수뿐만 아니라 야인을
응접해야 하므로 인물과 언변이 두루 갖추어진 인물을 가려 보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데 세종은 이를 가납하여 2월 20일 이조에 이 내용을 전지
한다.

그리고 윤 2월 15일에는 충청도 관찰사에게 전지하여 "함길도 절제사
김종서의 아내가 지금 공주에 살면서 오랜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어육의
종류는 다소를 논하지 말고 연속하여 주어 섭양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이때 충청도 관찰사로 있던 정인지(1396~1478)는 김종서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었던지 왕명을 바로 거행하지 않았던 듯, 3월 5일에 세종대왕
은 다음과 같이 서릿밭 같은 왕명을 다시 내린다.

"전자에 전지해 이르기를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의 아내가 병으로
고생한지가 오래이므로 어육을 연속하여 대어주라고 하였었는데 지금까지
한번도 주지 아니하였다고 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사연을 갖춰 아뢰고
지금부터 어육을 연속해 주도록 하라"

세종대왕이 몹시 진노하였던 듯하다.

그래서 그랬던지 이런 왕명이 내려진 직후인 6월 12일자 인사행정에서
충청도 관찰사는 윤형(1388~1453)으로 교체된다.

이날 김종서에게는 정 2품 자헌대부의 품계가 제수되었다.

그리고 7월 21일에 김종서가 그 맏형인 김종흥이 황주목사로 내려가면
병든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돌보아줄 사람이 없게 되니 서울 근처의 수령
으로 바꿔 달라는 글을 승정원에 보내자 세종은 김종흥을 남양도호부사로
당장 옮겨주는 은전을 다시 베푼다.

세종이 김종서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였는지를 알려주는 사실들이다.

이렇게 김종서가 세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북변의 절대권자로 오래 군림
하게 되니 자연 안팎에서 이를 시기하고 원망하는 무리들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김종서의 인척으로 그가 천거하여 회령절제사를 지내고 돌아온
박호문(?~1453)이 세종에게 김종서를 참소하는 일이 일어난다.

세종은 참소인 줄 짐작하여 못들은 척 하려다가 근래에 김종서가 올린
서장에서 "회령의 절제사와 판관은 병중에 있고 관청에는 저축이 없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을 상기하고, 박호문에게서 들으니 회령에 백성들이
들어와 산 이래 자애로운 정치를 보지 못하여 7년 사이에 정군이 1백52명
이나 도망하였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된 일이며 다른 진도 이러한가.

절제사 박호문과 판관 이원손이 병든 것은 불과 두어달인데 어떻게 저축이
바닥날 수가 있는가 하고 11월 12일에 김종서에게 전지를 내려 묻는다.

박호문의 참소가 있었던 사실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김종서는 12월 10일
임금께 답장을 올려 사실 보고를 한다.

경흥은 도망자가 2호이고 경원은 도망자가 없으며 종성은 13호인데 회령만
여러 해에 걸쳐 도망한 것이 도합 1백52호 이다.

이는 그간 이곳을 다스렸던 이징옥과 박호문이 각기 하나는 백성을
어루만지는데 서툴렀고 하나는 지나친 토목사업을 벌여 괴롭혔기 때문
이었다고 밝힌다.

그래서 이미 이징옥에게는 은혜가 적고 위력만 많은 것을 면책하였고
박호문에게는 경력 이사증을 보내어 토목사업을 중지시키고 장려하게 지은
관청건물을 헐게 하는 조치를 취하였었다고 보고하며 이들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던 것은 각기 야인을 잘 방비하는 장점과 잘 어루만지는 장점이 있어
모두 변경을 지키는데 필요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에 세종은 이 선에서 이 무고사건을 덮어 두려 하였으나 박호문은 오히려
참소 내용을 외부에 흘려 사헌부로 하여금 김종서를 탄핵하게 하려 하니
사헌부는 이 참소 사건의 사실 여부를 은밀히 조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박호문의 개인감정에 의한 무고라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아예 탄핵을
포기하게 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