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부도옹"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다.

"기업인은 현장에서 산다"며 불편한 몸으로 현장을 누비던 정인영
한라그룹 회장이 이제 "오뚝이신화"의 바톤을 차남인 몽원씨에게 넘겨줬다.

"휠체어 총수" "인간기관차" "불도저"..그의 별명이다.

모두 "기업가로 뛴다"는 그의 인생철학이 담겨 있다.

한라는 현대양행을 기준으로 34년의 짧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지만
재계에서 오늘의 위치에 오른 것은 따지고 보면 최근 10여년내의 일이다.

80년 정부의 중화학투자조정으로 현대양행(현 한국중공업)을 잃은뒤
사실상 완전히 좌초상태에 빠졌던 한라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바로 아랫동생이면서도 혼자의 힘으로
재계 위의 대기업으로 재기했다는 것은 기업가로서 그의 집념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한다.

한라 재기는 정인영만이 연출해낼 수 있는 드라마였다.

그만큼 희수(77세)의 정회장은 기업인들의 귀감이다.

그는 우선 70년대 당시 불모지였던 기계공업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제조업만을 고집해온 타고난 기업인이다.

기계공업의 역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72년 현대양행 경기도 군포공장에 종합기계공장을 건설한 그는 여기서
국내 처음으로 굴삭기 불도저 크레인 등 건설중장비를 생산했다.

77년에는 2억3천만달러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잔시멘트 플랜트
턴키베이스로 수주, 플랜트 수출 1호의 기록도 세웠다.

플랜트를 생산하는 공장으로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던 현대양행도
그의 역작이다.

그는 범인이라면 좌절할 수 있었던 두차례의 시련을 넘긴 인간승리의
귀감이라는 점에서도 기업인들의 귀감이 된다.

80년 혼신의 노력을 쏟아붇던 현대양행을 잃고 급기야 영어의 몸이 되는
비운을 맞았다.

남은 것은 현대양행의 1개 부서를 독립시킨 만도기계와 한라자원
인천조선뿐.

그리고 부도덕한 기업인이라는 멸시와 냉대 뿐이었다.

그는 그때의 감정을 "몇천길 낭떨어진 것 같았고 그 이후도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암흑속에서 살았다"고 회상한다.

그 어려움을 딛고 재기해 89년 서울 대치동에 남보란 듯 번듯한 사옥을
지은 그는 또다른 좌절을 겪어야 했다.

그해 7월21일 새벽 일본 재계 인사를 만나러 나가다 호텔신라에서
중풍으로 쓰러진 것.

그가 치료차 미국으로 떠날때 당시 70대의 노기업인이 경영일선에 다시
복귀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의 등소평에 비유에 그를 "불도옹"으로 부르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연간 2백일을 넘는 해외출장으로 재계 총수중 가장 활기차게 현장을
누비고 있다.

다만 이제는 나이가 문제가 됐을 뿐이다.

그는 기업인들에게 또다른 면에서 귀감이 된다.

절대 정치권과 야합하지 않는다는 것.

노태우전대통령의 비자금 태풍도 한라만은 비껴 갔을 정도다.

"돈 갖다주러 가서 기다릴 시간이 있으면 생산라인 한번 더 보는 것이
났다"고 이야기 하는 그다.

그탓에 전-노정권 당시 세무사찰을 3번이나 받았지만 사업다각화로
위기를 넘겼다고 술회한다.

그는 23일 기자들에게 "해외사업과 국내 신규사업중 굵직한 것만을
챙기겠다"고 말했다.

그를 잘아는 기업인들은 이 말을 뒷자리에서 수렴청정을 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경영자의 첫째 덕목을 "꿈과 신념"으로 꼽는다.

가장 즐거웠고, 가장 슬펐던 때를 같이한 한국중공업을 되돌려 받는 일,
중공업을 본격적으로 키우기 위해 발전 원유 천연가스 등 해외에너지를
개발하는 일.

그가 마지막으로 간직한 "꿈과 신념"은 이 두가지 뿐이다.

<김정호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