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 언니가 연꽃의 신령이 되었다는 것은 하늘의 비밀이에요.

천기를누설하면 머리에 다섯번 번개를 맞는다는 거 아시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면 안 돼요"

견습시녀가 한술 더 떠서 짐짓 진중한 어투로 주의를 주었다.

보옥은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는 표시를 해 보였다.

아무튼 청문이 연꽃의 신령이 되었다고 하니 보옥의 슬픔은 한결
덜어졌다.

보옥은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아내고 습인과 견습시녀 두어 명과 함께
바깥 뜰로 나갔다.

마침 팔월 달이라 거기 연못에 연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래 청문이 같은 여자가 저 연꽃들을 맡아야해.

어떤 진흙탕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연꽃은 청문이랑 서로
닮은 데가 많거든.

병들어 파리한 얼굴을 하고도 밤이 깊도록 보옥의 옷을 만들던 청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보옥은 연꽃이 만발한 연못가에서 청문을 위한 제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청문이 평소에 좋아하던 흰 비단을 가져오게 하여 거기다 제문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제문의 제목은 "부용여아를 위한 고사"라고 하였다.

보옥은 그 제문을 연꽃 가지에 걸고 나서 청문을 위해 간단한 제물을
차렸다.

그 제물들은 여러 종류의 꽃술과 빙교의 명주와 심방천의 샘물과 풍로의
차, 그렇게 네 가지였다.

보옥은 시녀들과 함께 연꽃들을 향하여 큰절을 올린 후, 제문을 읊기
시작했다.

"유세차, 태평성대의 해, 부용과 계화가 다투어 피는 달, 속절없이
찾아온 이날에, 이홍원의 때묻은 이 옥 (보옥 시신을 가리키는말)은 삼가
네 가지 제물을 바치며 추염부용여아앞에 정성껏 제를 드리옵나이다.

여아가 이 어지러운 세상에 태어난지 어언 십륙년, 본적과 성씨는 분명치
않았으나 옥은 여아와 함께 놀기를 좋아하였도다.

여아는 옥의 곁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목욕을 같이 하기도 하고, 뜰을
함께 거닐기도 하였으나 결코 몸을 섞지는 않았어라.

이렇게 오년 팔개월 동안 치밀하기 그지없으면서도 몸은 섞지 않은
희귀한 남녀 관계, 그 나름대로 아름다웠도다.

질박하면서 깨끗하고 화사한 용모, 뭇여인들이 부러워하였어라.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악취나는 풀들이 난초 같은 그대를 시기하여
내칠 줄이야.

그대의 앵도 입술은 빛을 잃고 살구 뺨은 여월 대로 여위고 입에서는
연일 신음소리뿐이라.

한량없는 수심에 마음을 갉아대는 원통함.

그대의 병세는 더욱 깊어만 갔어라.

그대 죽어 사라진 지금, 넓은 강에 뗏목 지나간 흔적처럼 그 자취
찾을 길 없어라"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