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4년은 우리 수출사에 하나의 획을 그을 만한 해였다.

반도체가 단일품목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수출 100억달러를 돌파했던
것이다.

1987년 섬유류수출이 100억달러를 넘어서긴 했다.

그러나 섬유류가 광범위한 품목군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명실상부하게 단일품목으로서 100억달러를 넘기는 반도체가 처음이었다.

반도체의 수출실적은 과연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반도체의 수출호황은 94년에 이어 작년에도 계속되어 무려 70.1%가
늘어난 220억달러를 기록했다.

이로써 반도체는 우리나라 최고의 수출품목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올해 7월까지 반도체의 수출 증가율은 불과 2%미만으로 전체
수출 증가율 10%에 크게 못미침으로써 수출부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더욱이 시간이 흐를수록 반도체의 수출 감소세가 가속화되면서 과연
단일품목의 수출실적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수출구조가 바람직스러운
것인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우리 수출은 절반 이상이 연간 10억달러 이상을 수출한 12개
대기업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중에서도 대기업 제품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반도체 자동차 화학제품의 수출비중이 40%에 달하는 편중현상을
보였다.

금년에도 이들 제품의 수출부진이 곧바로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부진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보면서 이를 보전해야 할 우리 중소기업의 역할이 그
어느때 보다 아쉽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은 지난 30여년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 전체
수출의 약 40% 내외를 꾸준히 차지해 오늘의 우리 경제를 이끌어 온
공로자였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올해 우리 수출이 부진하다고는 하나 그나마 아시아 주요국들에 비해
수출신장률이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중소기업 수출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의 유명한 컨설턴트 헤르만 사이몬 박사는 "드러나지 않은
강자(Hidden Champions)"라는 저서를 통해 독일 중소기업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사이몬 박사는 각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연간 매출액
10억달러 미만의 알려지지 않은 중소기업 500개를 조사, 상당수가 작은
분야이기는 하지만 전문분야 세계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가령 담배 제조기를 생산하는 하우니사는 세계 시장의 90%를 점유,
세계에서 생산되는 모든 필터담배는 이 회사가 발명한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바데르사는 생선가공 시설재 시장의 90%를 차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조차
이 회사의 제품이 흔히 거래되고 있었다.

이들 500개 기업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평균 30.1%나 되었으며,
1억3,000만달러에 달하는 연간 평균 매출액의 51.4%는 수출을 통해 벌어
들이고 있었다.

대부분 가족기업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틈새분야를 개척, 익명성을
오히려 즐기면서 42.9%가 50년 이상, 24.4%가 100년 이상 지속해 왔다.

이들은 불황기에 오히려 시장 점유율을 높여 위기를 통해 더욱 강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시장을 최대한 좁게 정의하여 파고들지만 지역에는 결코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일념으로 도전하고 있다.

단추 전문 메이커인 유니온크노프사는 무려 25만 종류의 각종 단추를
생산, 세계 어디서 누구에게나 판매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기적의 기업들이 아니었다.

특별한 경영능력이나 자본을 가진 것도 없이 그저 맡은 분야에서 고객의
사소한 지적도 경청해 가며 묵묵히 세계 일류를 추구해 왔다.

대기업들의 도전도 한곳에만 집중하는 이들을 이길 수 없었다.

급격한 환경변화 속에서 대기업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기 어려우며
탄력기업(flex-firm)들이 득세하게 된다는 토플러의 예측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뿐아니라 대만이나 일본의 경제가 대외 경기변동에 비교적 덜 취약한
것도 중소기업이라는 튼튼한 하부구조에서 비롯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앞으로 우리 중소기업의 역할은 작금의 수출부진을 타개하기 위한
대안으로서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 경제의 체질을 강화하고 성장의 견인차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중소기업청이 발족된 것도 이의 실현을 위한 정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KOTRA도 모든 역량과 사업을 중소기업의 수출기업화와 국제화에
기울여 나갈 것이다.

우리 중소기업에서 많은 세계적인 일류기업이 배출될 때 우리나라도 세계
일류 국가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이제 중소기업이 본격적으로 나서고 우리 모두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명제도 여기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