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욱 < 한국이동통신 사장 >

해방 이후 중학생이 된 내가 학교 공부보다는 무선 취미활동에
더 몰두하게된 데에는 당시의 불안정한 시국 탓도 있었다.

해방후 약 3년간 실시된 미 군정동안 정치적으로는 좌우익의
대립으로 사회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여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극심한 인플레와 남북 분단으로 인한 경제구조의 불균형, 그리고
전력 원자재 등의 부족이 커다란 사회 문제로 대두되어 우리나라의
안정과 성장을 가로막았다.

당시의 상급생 중에는 우리에게 "자본주의의 내막"이라는 사상
서적을 읽힌 사람도 있었으며, 1946년8월 미군정이 경성대학과 경성
의전 경성치전 경성법전 경성고공 경성고상 수원고농 등을 통합하여
국립 서울대학을 신설하고 총장에 미국인을 임명한다는 국립대학교
실시령이 발표되자, 식민지 교육반대와 학원의 자유와 민주화를
내걸고 교수 학생 노동자들의 파업과 동맹휴학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학원 안팎은 늘 어수선하였으며, 어린 중학교 학생들까지
국대안을 반대하는 동맹휴학 때문에 제대로 수업이 되는 날이 드물었다.

이런 시절에 그나마 무선에 재미를 붙여 이런저런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쓸모있는 취미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같은 시점에서 종전 후의 일본이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해
나갔는지를 눈여겨보면 우리는 여기서 적지 않은 교훈을 얻게 된다.

이른바 "성전"에 이바지했던 일본의 기술자들은 패전과 함께 일시에
커다란 실의에 빠졌음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특히 그 가운데 전쟁 초기에 미국을 놀라게 했던 일본의 신예 전투기
"제로셍"을 개발했던 항공 기술자들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모든
군수산업이 해체되자 한순간에 일과 직장을 잃는 처참한 좌절을
경험해야 했다.

그동안에 애써 익힌 설계 기술과 생산 공법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은 뻔했으며, 이제 각자 귀향하여 생계를 걱정하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여러 차례 모임을 가진 끝에 비록 전쟁에는 졌지만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는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비록 직접적으로 항공기 기술에 힘을 쏟을 수는 없었지만
고도의 정밀성과 신뢰성이 요구되는 철도의 고속화를 통하여 우회적
으로나마 자신들의 기술을 활용하고 전승하기로 결의했다.

물론 이는 기존의 철도기술자들의 반발을 샀고 견제를 받기도
했지만, 결국 이들은 "신칸센"이라는 일본 독자의 고속전철
개발에 크게 기여했다.

그 뒤 얼마 안가 미.일 강화조약으로 상황이 바뀌자 그들은
"YS-11" 이라는 중형 터보프롭 항공기를 개발함으로써 와신상담 끝에
일본 민간항공의 기술 자립에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한편 일본 점령군 총사령관이 된 맥아더 원수는 당시 일본의 전기
철도 통신 등 사회 기반이 취약함을 발견하고, 특히 품질 관리면에서
낙후된 일본의 산업을 돕기 위해 본국에 품질 전문가의 파견을
요청했다.

품질 전문가로 일본에 파견된 데밍 박사 일행은 당시 일본의
20,30대의 젊은 산업기술자에게 품질기술에 대한 현장 교육을 중점적
으로 실시했다.

이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전후 일본의 전자 및 통신산업을 주도
하였으며, 일본을 가전제품과 아마추어 무선기기에서 미국을 압도하는
세계 일류 공업국가로 부상시켰다.

그 뒤 일본인들은 데밍 박사의 업적을 기려 품질 향상에 탁월한
공을 세운 기업이나 개인에게 데밍상을 해마다 수여하고 있다.

흔히 우리나라와 일본의 기술 격차가 몇십년 정도가 된다고 말들을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시간의 격차로 따질 것이 아니라, 그때
그 나라 지도자들이 취한 정신 자세와 행동 지향을 놓고 따질 문제다.

미국은 1948년 벨 연구소에서 발명한 트랜지스터를 주로 공공통신
방위산업 우주항공개발 등에 응용하였던 반면, 맥아더 원수의 군수
산업 해체로 자연스레 민간 수요에 눈을 돌리게 된 일본의 기술자들은
트랜지스터를 가전 제품이나 아마추어 무선기기에 응용하여 양산형
내수산업을 부흥시키면서 동시에 수출산업화했다.

이것이 바로 제조 분야에서 일본이 전세계를 앞서는 경쟁력의
원천이 된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민간 기술을 최근의 걸프만 전쟁에서 이름을 떨친
패트리어트 미사일과 같은 군사 기술에 제공하라고 미국이 정치적
압력을 가하게 된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사례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 한가지는 일본이 전쟁
전후의 기술을 사람과 사람의 연결로 그 맥을 이어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같은 기술의 연속성이 바로 일본의 산업이 단절 없이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개화기에 우리나라 처음으로 근대 과학기술에 눈이 뜬 선각자들이
있었지만, 그 맥을 이어야 할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구미식 전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우리 통신 분야에도 일제하에 와세다 대학을 나와 기술 관료로
활약하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공대 교수, 체신부 전무국장 등을 지내신
이재곤선생, 서울대공대 조정만 오현위교수 같은 분들을 그 반열에
올릴 수 있다.

내가 오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53년 피란시절 부산 동대신동에
있던 판잣집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때이다.

나는 당시 그분이 현역 공군대령으로 통신감과 서울대공대 학생
과장을 겸직하고 계셨다고 기억한다.

법조인이자 당대 재산가의 아들로 태어난 오선생님은 초등학교
시절 과학시간에 배운 전기 현상에 흥미를 느껴 전기공학자가 되기를
꿈꿨다.

그뒤 일본 와세다 대학 전기공학과에 입학하여 통신공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음에도 그 분들의 뜻을 펼만한
기회는 오지않았다.

최근 어느 잡지에 실린 그분의 회고를 들어보자.

"대학 졸업후인 1940년에 도쿄에 있는 국제전기통신(주)에 취직해서
3년동안 근무했다.

일본은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물자가 달리자 모든 생활필수품에 대해
배급제를 실시했다.

도쿄생활이 점점 어려워져 서울지사 근무를 지원했다.

서울로 발령을 받고 와보니 도쿄보다 어려움이 더 많았다.

특히 일본에 있을때 보지못했던 조선사람에 대한 차별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참지 못해 6개월만에 사표를 던지고 고향인 선천 인근의 시골에
들어가 지내다 해방을 맞았다"

풍족한 환경에서 태어나 최고의 학벌을 갖춘 분들이 이 정도였다면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뜻을 품고 스스로의 재능을 키운 분들의 어려움은
어떠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해방을 맞이하여 경자유전의 토지개혁으로 하루아침에 가세가 기울게
된 도시의 지주들은 악성 인플레로 휴지가 돼가는 지가증권을 팔아
생계를 꾸리거나 자손들의 학비를 대야했다.

이러한 처지에서도 전쟁까지 겪으면서 피란지에서 대학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나는 꽤나 행운아인 셈이다.

나는 집안의 어른들은 물론 새삼 통신에 뜻을 품었던 분들의 인생
행로에서 소중한 교훈을 찾는다.

능력은 있었으나 발휘할 기회를 갖지못했던 선배들이 남긴 역사의
단절로 인해 밀린 숙제를 누군가는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 분들과의 연대는 그렇게 정신적인 각오로 늘 내가슴에 남아있다.

언젠가 나는 우연한 기회에 미국 군정당국이 워싱턴에 제출한 한국의
미래비전에 대한 보고서를 읽고는 꽤나 놀란적이 있었다.

그 보고서는 1948년에 미국 주둔군의 군정 차관인 헬믹(Charles G.
Helmick) 장군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한국은 결코 높은 수준의 생활을 누릴 나라가 될 수 없다.

한국은 쌀을 재배하는 원시적 농업경제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를
탈피하는 데에 필요한 기술교육을 받고 경험을 축적한 인력자원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빈약한 부존 자원이나마 활용할 인력을 양성할 기술교육기관도 없다.

미군이 철수한 뒤에도 물자를 공급해주지 않으면 한국은 소달구지
경제로 전락할 것이며 9백만명이나 되는 쌀을 생산하지 않는 사람들,
즉 농민이 아닌 사람들은 굶게 된다.

자원을 활용할 기술인력이 없는 한 한국의 미래는 없다"

이렇게 기억되는 그 보고서는 무전기에 심취해 장사동 일대를 헤집고
다니던 그시절의 나를 새삼 돌아보게 만들었다.

또 그때 나보다 앞서 무선통신에 열중했던 선배 동료들을 생각하게
했다.

모르긴해도 처음부터 어떤 커다란 목적을 가지고 그분들이 그토록
강렬한 의욕을 보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6.25가 나던 해인 1950년 아마추어 무선국을 열기전에 해외방송
청취(BCL)와 아마추어 무선청취(SWL)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방출된 미군무선기 등에서 뽑아낸 바리콘, 동조코일, 중간주파
트랜스(IFT:455kHz), 진공관 등을 이용해서 RF-1단 IF-2단 AF-2단 중파
및 단파 3밴드 수신기의 제작에 착수했다.

그러나 나는 의욕과 탐구심에 불타던 그 시절에, 기초산업이 없는
후진국의 청소년으로 태어나 겪었음직한 고통과 좌절을 유감없이
겪는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우선 수신기의 주파수 대역이나 감도를 재는 신호 발생기(signal
generator)나 동조회로의 공진 주파수를 알아내는 그리드 디프미터
(grid dipmeter) 같은 것은 갖추지 못했고 겨우 저항이나 전압 전류를
재보는 기본계측기(multimeter)뿐인 열악한 제작환경이 문제였다.

그때 나는 틈이 나는 대로 동네 라디오방에 들러 주인과 알음알음
으로 계측기를 빌려쓰거나 시험기기가 있는 어른들의 직장을 찾아다니며
눈치껏 조정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체험은 1-V-2수신기나 슈퍼 헤테로다인 수신기 제작을
통해 깨달은 자작한 수신기가 가진 성능의 한계였다.

이를테면 다이얼 메커니즘이 너무 엉성해서 수시로 주파수 눈금을
맞추어야 했으며 감도를 높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고주파 증폭
2단까지는 정상으로 작동하지만 그 이상이 되면 발진이 일어나고
중간 주파 증폭도 2단까지가 고작이었다.

이처럼 내가 만든 수신기는 미국의 군용수신기에 비하면 너무나
엉성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해외의 단파 방송을 듣는 데에 열중하다 보니 제대로 수신을 하려면
다이얼 메커니즘과 주파수 안정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과 외국어와
지리에 능통해야 함을 통감하게 되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