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시월이 다가왔다.

설씨 집안에서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점원들을 위해 송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점원들은 그렇게 시월께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이듬해 봄에 물건들을 장만해
가지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고참 점원에 속하는 장덕희가 설반에게 작별인사를 드리러 와서 내년
시세를 예상하며 말했다.

"올해 종이와 향료가 부족하였으니 내년에는 값이 많이 오를 것입니다.
내년 봄에는 종이와 향료를 잔뜩 사가지고 와야겠습니다. 원가와 잡비,
세금들을 제하고 나도 이익이 몇 배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덕희는 맏아들을 시켜 전당포 사업에까지 손을 대어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설반은 어찌해서든지 돈을 벌기 위해 아득바득 애를 쓰는 장덕희가 부럽기
까지 하였다.

장덕희는 그래도 인생의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이게 무슨 꼴인가.

여자나 밝히고 남자 엉덩이나 탐하다가 얻어터져 이렇게 몸져 누워 있지
않은가.

"덕희, 나도 자네를 따라가면 안 되겠나? 자네 고향에 가서 쉬면서 몸도
회복하고 자네한테 장사하는 법도 배우고 말이야"

"저야 도련님을 모시는 것이 영광이지요. 우리 고향은 산천이 좋아 원기를
회복하는데 그만이지요. 장사하는 법은 제가 오히려 도련님에게 배워야
하고요"

장덕희가 흔쾌히 받아들였다.

설반은 내친 김에 어머니 설부인에게 가서 자기 뜻을 아뢰었다.

하지만 설부인은 설반이 자기 곁에 있어도 말썽을 피우는데 자기를 떠나
있으면 얼마나 더 말썽을 피울까 하고 설반의 계획에 반대 의사를 표하였다.

"어머님, 저도 이제 사람이 되어볼까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으면 못된
친구들이 자꾸만 꼬드겨서 아무리 나쁜 짓을 끊으려고 하여도 작심삼일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장덕희는 사람이 듬직하고 믿을 만하지 않습니까.
장사를 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도 그렇고, 자기 가정을 꾸려가는 것도 그렇고,
내가 배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설혹 내가 장덕희를 따라가 이전
버릇 대로 잘못된 길로 빠져들면 장덕희가 나를 꾸짖어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머님은 저를 이 집안에 매어두려고만 하지 마시고
장덕희를 따라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렇게까지 설반이 간청을 하니 설부인으로서도 한번 더 속는 셈치고
허락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설부인은 장덕희를 불러 설반을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장덕희와 설반은 길일인 열 나흗 날에 필요한 사람들을 데리고
먼길을 떠났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