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부로 성친을 가서 대관원에 들렀다가 궁궐로 돌아온 후비 원춘은
보옥을 비롯하여 집안 사람들이 지은 글들을 다시 보고 싶어서 여동생
탐춘을 시켜 그 글들을 정서하여 올리게 하였다.

대관원 각곳의 경치를 읊은 그 글들을 탐춘이 빼어난 서예를 발휘하여
정성껏 옮겨 적어서 원춘에게 올렸다.

원춘은 그 글들을 대관원 비석에 새겨 기념하라고 지시하였다.

가정은 각처에서 솜씨 좋은 석공들을 불러 대관원의 돌들을 깎아
글을 새기게 하였다.

석공들은 돌에다 초를 녹여 부은 후 붉은 글씨로 쓴 원고를 그 위에
붙이고는 각종 석각 기구들을 사용하여 글을 새겨넣었다.

그 공사가 진행되고 있을 무렵, 가정은 일전에 대관원으로 불러들였던
열두명의 어린 도사들과 열두명의 어린 중들을 어떻게 처리해야할 것인가
궁리하였다.

아무래도 도사들과 중들을 원래 그들이 기거하던 옥황묘와 달마암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좋을듯 싶었다.

이런 낌새를 눈치챈 가근의 모친 주씨가 희봉에게 찾아와 도사들과
중들을 옮기는 일에 자기 아들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희봉은 주씨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우선 왕부인을 찾아가 도사들과
중들을 옮기는 문제에 대해 자기 의견을 내놓았다.

"가정 대감은 도사들과 중들을 전에 있던 곳으로 돌려보낼 의향이신것
같지만, 그렇게 멀리 보내버리면 후비께서 갑자기 오신다든지 할 경우
그들을 금방 불러들이기가 어렵게 되지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도사들과 중들을 우리 가씨 가문의 절인 철함사로
보내놓고 필요할때 즉시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집니다"

결국 희봉의 의견이 왕부인을 통하여 가정에게 전달되고 가정도 희봉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다음날 희봉이 남편 가련과 아침 식사를 하면서 주씨 아들 가근
문제를 넌지시 꺼내었다.

"가정 대감이 서방님을 불러 도사들과 중들을 철함사로 옮겨서 관리하는
일에 누가 적임자이겠느냐 하고 물으면 가근이를 추천해주세요"

"나도 부탁받은 데가 있는데. 서쪽 행랑채에 사는 아주머니가 자기
아들 운아에게 일자리를 좀 달라고."

"운아는 대관원 보수 공사가 시작되면 그 일을 감독하도록 하면 되고,
이번 일은 가근이 맡도록 해주세요"

희봉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청을 하자 가련은 희봉의 허리를 슬쩍
껴안으며 말했다.

"내가 양보하기로 하지. 근데 어젯밤에 왜 내말을 안 들었어? 난 체위를
좀 바꿔보고 싶었는데"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