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인이 오늘 아침 집으로 갔을 때 어머니와 오빠는 습인의 몸값을
마련하여 영국부에서 데려와야겠다고 하였다.

그만큼 집안 형편이 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때 습인은 보옥이 자기를 절대로 내보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습인 자신이 여러 식구들이 복작거리는 본가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형편이 좀 폈다고는 하지만 영국부에 비해서는 얼마나 꾀죄죄한
집안인가 말이다.

그래서 어머니와 오빠 앞에서 습인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표시하였다.

"제가 영국부로 팔려갈 때의 일을 생각해보세요.

그때 우리집은 먹을 게 없어서 식구들이 다 굶어 죽게 된 형편이었죠.

아버지는 앓아 누워있고 어머니 역시 몸이 불편한 가운데 아버지
병구완하느라 정신이 없고 오빠는 일거리도 없이 그냥 빈둥거리고
있었죠.

어디 팔려 가서 얼마의 돈이라도 집에 보탤 수 있는 거라곤 내 몸뚱어리
밖에 없었죠.

다행히 영국부로 팔려가서 다른 집에서처럼 매를 맞거나 욕도 먹지 않고
그 댁 식구들과 다를 바 없이 먹고 입고 하고 있죠.

그리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그동안 집안 형편이 얼마나
나아졌어요?

혹시 살림이 어려워 저를 되찾아 다른데 돈을 더 받고 팔 작정이라면
모를까, 그러지 않을 바에야 저를 그대로 영국부에 있게 내버려 두세요.

보옥 도련님도 저를 결코 내보내지 않을 거예요.

무엇보다 제가 영국부로 팔려 갈때 계약서에 저는 다시 찾아갈수 없는
몸으로 되어 있잖아요"

"보옥 도련도 그 계약서 내용을 아니?"

습인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옥 도련님은 그런 자세한 내용까지는 몰라요.

대부인과 왕부인만 아시고 계시죠"

"계약서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하더라도 워낙 덕망이 높은 집안이라
우리가 몸값을 마련해 가지고 가서 간절히 부탁을 드리면 들어주실 거라
생각했지.

그리고 또 아니? 몸값도 받지 않고 너를 우리에게로 보낼지.

하지만 네 생각이 그렇다니 우린들 어떡하겠니?"

습인의 오빠 화자방이 습인 데려오는 일을 포기하겠다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차에 보옥이 습인의 집으로 놀러왔고, 보옥이 습인을 각별히
여긴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습인의 어머니와 오빠는 습인 데려오는 일을
정말 포기하고 만 것이었다.

이렇게 습인이 오늘 집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고 있자니, 보옥이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잠꼬대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습인아, 이제부터 너를 내가 좋아하는 누나라고 부를게. 제발 가지마"

습인이 비씩 웃으며 침대로 다가갔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