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그룹의 총수들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 들어가는 장면을 연일 목도하는
국민들의 시각은 크게 두갈래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당연론"이다.

노태우전대통령의 엄청난 부정축재사건을 도운 "공범"이니 당해 마땅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동정론"이다.

비자금 조성에 어쩔 수 없이 끼어든 기업인들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죄인
취급을 하느냐는 주장이다.

둘다 일리 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당연론이 옳으냐" "동정론이 타당하냐"를 따지는게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다른데 있다.

기업총수들을 "단체기합"으로 내몰아 망신주고 나아가 사법처리까지 한다고
이같은 일이 다신 일어나지 않겠느냐는 점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이런 식의 시도는 과거에도 여러번 있었다.

사실 우리 기업인들은 권력의 변동기 때마다 정경유착이라는 검은 고리
탓에 단죄의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 60년 4.19혁명직후 과도정부에서도, 61년 5.16쿠데타이후에도 번번이
숙정의 대상이 됐다.

80년 신군부의 등장이후엔 뇌물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자정결의 대회를
열기까지 했다.

재계는 이번에 또다시 국민에 사과하고 정경유착을 근절하겠다고 다짐했다.

수사당국에 무더기 소환된 것도 물론 처음이 아니다.

그럼에도 조금도 달라진게 없다.

왜..

원인이 뭔가.

지난 3일 전경련회관에서 있었던 경제계 중진회의에서 어떤 그룹의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누가 청와대에 돈을 갖다 주고 싶어서 갖다 줬나. 자기돈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이 말을 뒤집어 보면 "기업을 죽여도 좋다고 내버려 두면 모를까 돈을
갖다 주지 않고는 사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로 5공때 공중 분해된 국제그룹의 양정모회장은 "정치헌금을 많이
내지 않아 대통령에게 밉보인게 화근이었다"고 주장할 정도다.

이렇게 보면 노전대통령이 받았다는 "성금"은 돈을 낸 쪽에선 결코 성금이
아니었다.

기업을 지키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내야만 하는 일종의 "정당방윙금"
이었다.

정경유착의 굴레를 벗어던지려면 바로 이런 정당바위금을 없애는 일에서
부터 출발해야 한다.

비자금 성금 떡값등으로 불리우는 돈을 내지 않아도 기업할 수 있는 풍토를
마련하는 수 밖에 없고, 그 대안은 역시 규제완화로 귀결된다.

정부의 규제가 최소화돼 모든 경제행위가 공정한 경쟁을 통해 투명하게
이뤄진다면 어떻게 될까.

기업은 돈을 갖다줘도 별무소득일테니 성금을 왜 내겠는가.

권력자의 입장에서도 "상납"않는 기업이 아무리 입광스럽다 대호 어쩔
도리가 없게 된다.

노대통령의 부정축재규모가 단군이래 최대라고 할만큼 어마어마해진 것도
당시의 정부규제 강도와 무관치 않다.

사실 6공정부는 기업에 대한 갖가지 규제와 압박을 한시도 늦추지 않았다.

일례로 초법적인 "5.8 부동산 매각조치"를 들 수 있다.

판정잣대가 명확치 않은 "업무용" "비업무용"이란 칼날을 휘둘렀다.

기업으로부터 반발의 목소리라도 나올라치면 은행여신중단과 세무조사등의
제재수단을 동원했다.

기업은 알아서 길수밖에.

"5,000억원"은 이렇게 해서 모다진 것이니 "부정부패는 행정규제를 먹고
산다"는 미 하버드대 제프리 삭스교수의 "부패경제학" 가설이 지금 한국에서
비자금 방정식으로 그대로 검증된 셈이다.

김영삼대통령은 취임초 "앞으로는 기업으로부터 단 한푼의 돈도 받지
않겠다"고 말하고 이를 시종일관되게 지키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대통령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정치인이나 관료 모두가 대통령처럼 한푼도 안받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불행하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못한것 같다.

한 국회의원이 기업인에게 은행차입을 알선해 주고 "사례비"를 받은게
들통나 구속된 건도 그렇고, 일선 행정관청 곳곳에서 뇌물수수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지금 이 시간도 어디에선가는 관료나 정치인들
은 규제의 칼을 들이대면서 뇌물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업쪽에선 또 규제의 벽을 넘어서는 가장 손쉬운 수단으로, 때로는 살아
남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으로 성금과 떡값을 준비하고 있을 게다.

그렇다면 규제의 벽은 누가 허물어야 하나.

두말할 필요없이 돈 안받는 김대통령이 해야 한다.

"돈 안받겠다"는 약속은 대통령혼자 김정부전체가 아니라 김정부 전체가
지키고, 그러기 위해선 흐지부지돼가고 있는 규제완환시책을 지금 다시
강력히 밀어부쳐야 한다는 말이다.

국내굴지의 대기업들이 노태우비자금사건에 휩쓸린 원인을 발본하지 않고
결과만 단죄해서야 어떻게 "역사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