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대의 수출공단인 구미공단 1단지의 북쪽끝에 자리잡은 계림동도.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중소기업과 전혀 다름이 없다.

좁은 마당에 제품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근로자들이 묵묵히 맡은 일을
하고 있다.

이곳이 구미공단에서 가장 긴 60일간의 파업을 겪은 악성분규업체였다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 지역은 공단이 조성되면서 노동집약적인 한일합작 기업들이 밀집되어
들어선 곳이다.

이회사는 지난 87년 계림요업과 일본의 TOTO기기가 합작으로 설립한
조립식 욕실제품전문 생산업체이다.

대부분의 합작사들이 철수하거나 문을 닫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회사는
원만한 노사관계를 바탕으로 성장을 거듭하는 대표적인 회사로 꼽히고 있다.

이회사의 노조도 민주화의 물결이 몰아치던 지난 88년에 설립됐다.

노사설립이후 노사간 갈등의 골은 깊어만갔다.

회사설립 초기인데다 보수적인 대구경북지역의 문화적인 분위기, 경영진의
노동운동에 대한 이해부족이 맞물려 노사분규가 폭발했다.

노조인정을 둘러싸고 88년 27일간의 파업이 발생했다.

다음해에는 임금인상을 둘러싸고 60일간이라는 구미공단 최장 파업기록도
세웠다.

이러한 진통의 과정에서 노사 양측은 반성하기 시작했다.

회사와 더불어 살아야한다는 현실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구심점을 마련해 나가기 시작했다.

회사측은 당시 근로자수가 1백여명에 불과했음에도 불구, 노조위원장의
전임을 인정하고 회사의 경영상태를 노조에 공개했다.

노사간담회도 정례화했다.

공식적인 모임외에도 사장이 수시로 노조관계자를 만나 현안을 청취하고
회사측을 대표해서 근로자들의 애로를 수렴, 해결할 수 있도록 전담 창구를
개설했다.

노조도 회사의 현실을 넘어서는 무리한 요구를 자제하고 합리적인 선에서
점진적인 개선을 요구했다.

90년의 복지기금과 상여금인상,91년의 학자금과 하기휴가비인상등 근로자
들에게 실익이 되는 사항들을 점진적으로 요구했으며 회사측도 이를 적극
수용했다.

노조도 합리적인 회사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서보철사장은 "90년 이후로는 단한번의 노사분규도 없었다. 1인당 생산성은
89년보다 50%가 높아졌으며 매출도 7~8배이상으로 늘어났다"고 자랑한다.

회사측은 노사가 일체감을 가질 수 있는 경영활동을 벌여나갔다.

생산직과 관리직의 일체감을 형성하기 위해 90년부터 근무복을 작업복으로
통일했다.

취미클럽도 결성해 직급 구분없이 1인당 연간 1만원씩의 보조금을 지원해
주고 있다.

생산현장의 조반장제도 도입과 함께 생산직도 관리직과 같이 과장이상까지
승진할 수 있도록 했다.

서사장은 "지금까지 생산직에서 과장까지 배출이 되었지만 앞으로는
부장급도 나올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힌다.

서사장은 제품특성상 현장에 냉방시설 설치가 곤란하자 근로자들과
동고동락을 한다는 취지에서 사장실에 지금도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고 있다.

유영화 노조위원장은 "서사장의 이러한 태도와 솔선수범이 노사간의
신뢰감 형성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 회사노조는 "무지개작전"으로 불리는 생산성향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장근로자들은 자발적으로 팀을 구성했다.

생산성이 크게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단체협약에 오후 출근도 가능하다는 규정으로 지각자가 속출, 생산에
차질을 빚자 노조에서 정시출근을 유도했다.

회사의 업무능률 향상을 위해 공휴일을 조정할 때도 노조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직원채용에도 노조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유위원장은 "올해 새로 뽑은 1백명의 사원중 절반이상을 조합에서 추천해
입사시켰다"고 밝힌다.

서사장은 "불만은 작은 것에서 부터 생긴다"며 현장의 애로를 가급적 빨리
시정해 근로자를 최우선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도록 고충처리위원회도 구성
하겠다고 힘주어 말한다.

<구미=신경원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