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역대 왕들중에서 생전에 사관이 기록한 실록을 보고 뜯어
고친 임금이 세사람 있었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창업한 태조,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달한 세조,
폭군이었던 연산군이다.

따라서 "태조실록" "세조실록" "연산군일기"를 읽다보면 사실과는 다르게
미화되거나 과장된 부분이 많은 것을 직감할수 있다.

이들이 사관들의 죽음을 무릅쓴 반대를 뿌리치고 이처럼 실록을 뜯어고쳤던
까닭은 자기들의 왕위에 오른 과정이나 패륜행위를 기록한 사서를 남겨서는
안되겠다는 "두려움"때문이었다.

사필을 그만큼 무서워 했다는 이야기도 되고 역사를 그만큼 중시했다는
말도 된다.

사화라는 것도 그래서 일어났다.

한국인만큼 역사에 관심이 많은 민족도 없다고들 한다.

자기 할아버지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도 단군이나 고구려 백제
신라등 고대사에 관한 관심은 지대한 것을 실감하게 되는 때가 많다.

반대로 현대사나 자기들의 눈앞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알려들지도 않고 무관심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다.

이 점은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눈앞에 전개되는 불의나 부정을 보면서도 "사필귀정"만 믿고 살아왔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이런 와중에서 자기의 "신념이 역사"라고 생각하는 정치지도자들이 출현
했으며, 이들은 "역사"를 두려워할 여유조차 없는 인물들이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등과 관련 내란죄혐의로 고소.고발된 58명 전원에게
불기소결정을 내렸다.

"정권창출 사법대상이 될수 없다"는 것이 검찰이 내린 결론이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나 정봉주살해가 사법심사대상이 되지 않았다면
주임검사의 부연설명도 적절한 비위는 못된다.

역사가가 된 심정으로 사건수사를 했다는 이야기는 더 그렇다.

결국 "5.18"은 다시 역사의 평가를 받도록 역사속으로 떠넘겨지고 있는
꼴이다.

"전두환정권은 단임대통령제를 이행했다는 점에서 일보전진한 것이며,
노태우정권은 대통령직선제에 의해 탄생했고 문민정치를 지향,민주정치의
길에 이받이 했다" 한 원로 사학자는 "한국사개설"에서 벌써 이렇게 평가를
내리고 있으니 "역사적 평가"라는 것도 믿을 것이 못된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한국사학계에는 역사의 현재성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사관이 돌풍처럼
몰아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역사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이들에게 훗날 역사의
심판을 받도록 한다는 것이 그대로 "면죄부"가 되어 "누구나 그래도 좋다"는
선례를 남길수도 있다는 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