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2년은 오일쇼크로 해외시장 개척에 애로를 겪고 있던 시절이다.
그때 일본 이토추상사의 세지마류조 부사장이 청와대를 찾아왔다.

박정희대통령의 ''특별주문''에 대한 답신을 두툼한 서류봉투에 담아
직접 내한한 것.

답신의 제목은 ''한국종합상사 설립에 대한 계획사''였다.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던 박정희정부는 이를 토대로 75년 4월30일
''종합상사 지정에 관한 상공부요령(상공부고시 제110607호)''를 공포했다.

이렇게해서 만들어진 한국종합상사들엔 ''조직·정보·자금''을 앞세운
일본상사들의 경영전략이 ''교과서''나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80년을 목표연도로 ''백억불수출·천억불소득''이란 구호를
내걸고는 이를 종합상사들이 앞서 헤쳐나가게끔 전폭적인 금융·세제
상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종합상사들은 정부의 기대에 부응해 신들린듯 5대양 6대주를 헤집고
다녔고 그 덕분에 ''백억불수출''은 목표연도보다 3년을 앞당겨 77년에
달성됐다.

종합상사제도의 첫 약효는 이렇게 드라마틱했다.

그로부터 17년이 흐른 94년. 삼성물산은 1백16억3천7백만달러 어치를
수출했다. 나라전체가 매달렸던 수출목표치가 한 상사에 의해 ''간단하게''
돌파된 셈이다.

종합상사의 ''막내''로 78년에 태어난 현대종합상사도 지난해 95억7천
5백만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그러나 이런 괄목상대도 일본상사에 비하면 왜소하기 그지 없다.

한국 종합상사의 지난해 수출입실적은 일본상사의 14분의1 수준이다.

일본상사를 모델로 삼고 뛴 결과치고는 너무 미미한 수준이다. 이처럼
큰 격차가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일양국 종합상사는 발전배경및 경영구조부터 다르다. 거래구조면에서
보면 일본상사들은 매출액 대비 수출 14%, 수입 16%, 내수 45%, 3국간
거래 25%등이다.

반면 한국상사의 매출액 대비 구성은 수출 65%, 수입 29%, 내수와
3국간거래 각각 3%등이다. 양국 종합상사의 활동방향이 다르다는 말이다.

양국의 내수부분 차이는 수출경쟁력과 직결된다.

일본상사는 수출을 하면서도 3천억달러 이상의 상품을 수입하고 있다.
한국상사들이 오로지 수출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면서 팔겠다는 측(일본)과 팔기만 하겠다는 측(한국)과 어느쪽이
유리할지는 자명한 일이다.

양국 상사는 중소기업과의 관계설정에서도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상사들이 중소기업과의 강한 계열관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상사들은 중소기업과의 관계가 ''뜨뜻미지근''하다.

이건 한마디로 한·일상사들의 출생배경과 자생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한국의 종합상사들은 정부지원을 등에 업은채 출범했고 여기에 계열
제조업체들의 상품을 건네받아 수출을 ''대행''해주면 손쉽게 실적을
올리는 습성아래 성장해왔다.

구태여 중소기업들을 어렵사리 발굴 육성할 필요성이 절박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일본상사들은 다른다.

메이지유신이 일기 전인 1800년대 후반에 미국 유럽등 ''양상''들의
일본내 무역독점에 대항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미쓰이 미쓰비시같은 상사들이 전형적 예다.

''거대 서양파워''와 대항키 위해선 국내 중소제조업체들을 계열화해
육성하는 등의 ''잡초같은'' 생명력이 불가결했다.

그 결과 한·일종합상사간에는 자금력과 물류·운송비용 조직력의
차이도 현격하다.

일본상사는 원자재로부터 중간제품및 최종제품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수직적 통합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경영진이 의사결정을 할때도 일본상사는 방대한 해외정보에 의존한다.

이에반해 한국상사들은 상품의 개발과 생산 판매활동계획의 수립에
한계가 있다. 정보부족이 한 원인이다. 정보부족은 자생력이 미습한데서
비롯된다.

해외지점 인력의 절대규모나 질의 측면에서도 한국상사는 뒤진다. 국내
상사의 해외지점은 서울본사와의 업무연결에 치중한다.

상사별로 현지에서 실제영업을 하는 현지법인과 지점은 20여개도 안된다.

한국상사가 최근 앞다퉈 추진중인 해외지역본부제의 경우 일본상사들이
70년대부터 시행하던 것이다.

해외현지화도 일본에 20년이상 뒤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국내 상사의 ''열위조건''은 매출액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일본 종합상사중 외형 1위인 이토추상사의 작년 매출액은 자그마치
16조1천3백49억엔. 한화로 1백30조원이 넘는다.

한국의 삼성 현대 대우 LG 쌍용 선경 효성등 7대상사의 작년 매출을
몽땅 합쳐봐야 그 절반도 못되는 53조6천7백억원 남짓에 불과하다.

눈을 조금만 밖으로 돌려봐도 한국종합상사의 현주소는 ''아직 구멍가게
수준''이라는게 금방 드러난다.

물론 ''공룡'' 일본상사들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얘기지만.

문제는 그런 일본상사들이 ''개방화''물결을 타고 한국시장에 몰려오고
있다는 점이다.

세지마 류조에게 ''95년판 한국종합상사 발전계획서''를 만들라면 어떤
내용을 담을까.

<김영근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