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질"이라는 말만큼 광범하고 다의적인 개념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삶(인생)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말하였지만 "바로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에 의견이 갈리고 있는
것이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나의 생활과 사상"에서 "나의 삶에는 두가지 체험이
그늘지고 있다.

하나는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와 고뇌가 넘쳐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의 정신적 퇴폐기에 내가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라고 고백
하였다.

아마도 "삶의 가치"에 대한 논쟁은 영원히 풀릴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원래 "삶의 질"(uality of life)이라는 말은 최근에 의료분야에서 정립된
개념이다.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은 병만 낫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생활
이나 인생의 질적인 면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가령 절제수술을
하면 병은 낫지만 신체가 부자유스럽게 된다든지 암으로 시한이 정해진
환자에게 부작용이 심한 항암제를 계속 투여할 것인가등 문제가 제기될 경우
환자의 희망을 가능한한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개념이 각분야로 확산되면서 지금은 "사람답게 사는 것"으로
일반화되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냐"가 또 문제가 되겠지만 지난 1월17일 국제
자원협력그룹이 발표한 "삶의 질"을 비교 평가한 보고서에 의하면 서울은
세계118개도시중 67위라고 한다.

뉴욕을 100으로 하여 다른도시들과 비교하여 순위를 매긴 결과 제네바가
1위였고 알제가 꼴찌를 기록하였다 한다.

"삶의 질"을 수치화하여 비교 평가한다는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이 보고서
내용을 보면 중국이나 아프리카등 후발개동국 도시들이 대부분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역시 경제발전이 "삶의 질"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수 있다.

우리나라도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시대를 눈앞에 두고 복지요구가 증대
되고 있는 상황에서 김영삼대통령이 23일 "삶의 질 세계화"를 선언한 것은
적절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김대통령은 기본 철학만 제시하였고 구체적 실천방안은 행정부에 맡겼기
때문에 정부는 각종 복지정책의 수립과 재원조달방안강구등 일이 산적해
있을 것이다.

사안의 성격상 민간의 협력이 긴요한만큼 민간의 의견을 수렴하고 참여를
유도하는 방안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