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교는 한마디로 군사 교육기관이었다.

처음에는 총대학교와 포대학교 두개가 설립되었는데,총대학교에는 도쿄의
근위부대에서 이탈하여 사이고를 따라 가고시마로 온 보병들을 수용했고,
포대학교에는 포병 출신들을 입교시켰다.

그리고 나중에 유년학교와 요시노개간사라는 것을 더 설립했다.

유년학교는 말하자면 사관학교였고,요시노개간사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업을 일으키는 농군학교인 셈이었다.

총대학교와 포대학교는 차츰 분교(분교)를 늘려나가 가고시마 출신의
수많은 청소년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사학교는 사이고의 사설 군사조직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러나 사이고는 직접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는 다케무라의 고향 집에서 농사와 사냥으로 나날을 보냈다.

사이고의 심복 부하들이 사학교를 책임지고 운영해 나가는 것이었다.

총대학교의 교장은 시노하라 구니모토였고,포대학교의 교장은 무라다
신하치였다.

그리고 유년학교는 총대학교 교장인 시노하라가 겸직하고 있었고,
요시노개간사는 히라노 마사스케와 나가야마 야스시가 맡아서 운영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학생이면서 동시에 병사들이기도 한 피교육자들에게 사이고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학문과 심신의 단련,그리고 전술 연구와 군사훈련
을 실시했고,개간사에서는 건실한 농군을 육성해 나갔다.

그런 방대한 조직의 사학교를 운영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었는데,
그것을 가고시마현 지사인 오야마 쓰나요시가 맡아서 현청의 재정에서
지불했다.

그 역시 사이고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사학교이면서도 실은 현비(현비),즉 공금으로 양성되고 있는
사이고의 군대인 셈이었다.

그렇게 현비를 지출해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처럼 가고시마 사람들은 사이고를 마음으로부터 지지하고 있었고,
유사시에는 그를 따를 각오들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사학교의 세력이 확대되어 사학교당으로 발전했다.

사이고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인사들이 크게 하나로 뭉쳐 정치세력을
형성한 것이었다.

그래서 마침내는 행정조직,경찰조직까지 모조리 사학교당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말하자면 가고시마현은 일본 속의 독립국가인 셈이었고,사이고는
아무런 지위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무관의 제왕과 다름이 없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