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초 행남사의 해외수출에 적극 뛰어들어 72년 한해 동안 미국
일본 동남아 등지에 4만5,000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용기를 입어 나는 장차 행남사의 미래를 내수보다는 수출로
상정하는게 여러가지 면에서 유리하겠다는 판단 아래 74년5월부터
구미인들의 기호에 맞는 스톤웨어( Stone Ware )를 생산해 수출할
계획으로 목포 상동공단에 행남특수도기(주)설립을 추진했다.

당시 스톤웨어는 다른 자기제품에 비해 생산비가 저렴할 뿐 아니라
관세가 싸고 대중성이 있었기 때문에 수출품으로는 적격이었던
탓이었다.

반면 다른 제품들은 인거비,연료비등의 제조원가가 너무 많이 먹혀서
수출을 하려고 해도 도저히 국제시장에서의 가격경쟁을 이겨낼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 신설공장은 대지 1만평, 건평 3,800평, 종업원 600여명의 대규모
공장으로 애당초 이것은 경기도 부평에 부지를 선정하여 인천의
항만시설을 이용, 수출에 나설 예정이었다.

수출공장이 중부지역에 있으면 양질의 원료 확보와 교통망이 용역할
뿐 아니라 서울 근교에 위치함으로써 각종 정보에도 쉽게 접근할수
있다고 잇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임원들의 이런 계획을 반대했다.

목포에 뿌리를 내리고 커온 행남사가 이제 수출중심으로 나아가려는
시점에서 그 근거지를 타지역으로 둔다면,상대적으로 목포는 그만큼의
고용과 지방재정 측면에서 큰 손실을 입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내가 새로 조성중에 있던 목포공단 입주 추진위원장
을 맡고 있었던 점도 크게 작용했다.

명색이 목포의 대표적인 향토기업인이라고 해서 공단 입주 추진위원장을
맡고있는 내가, 내 공장을 타지에 세우면서 다른 업체들에게는 목포공단
으로 입주하라고 할수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단 안에 아직 다른 공장들이 입주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수도,전기를
비롯해 시내버스마저 다니지 않아서 당시 건설에 직접 참여했던 종업원
들의 불편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매일처럼 출근하는 종업원들을 나의 승용차로 실어 날라야
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내 종업원들의 전사적인 노력 덕택에 웅장한 그 위용을
드러냈다.

내게 있어 이 행남특수도기의 준공은 일제시대 이래 비롯된 행남사
30년 역사상 상당히 의미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여태까지의 협소한 내수시장을 벗어나 국제시장으로의 본격적인
진출을 시도하는 첫 발걸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장이 가동되면서 수출주도로 전환해가려는 나의 계획은 착실히 열매를
맺어가는듯 했다.

그러나 처음 기대와 달리 얼마 지나지 않아 경영적자가 누적되어 갔다.
우리가 만들어낸 수출품들이 해외시장에서의 높은 기술경쟁력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수동설비에만 익숙해있던 종업원들은 새 설비에 적응하지 못했고,12대나
되는 자동성형기와 자동시유기에서의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어 거의 90%
에 가까운 불량율을 기록했는데, 한번은 이렇게 나온 불량품 그릇들을
깨트리느라 전 종업원들이 꼬박 하루를 허비하기도 했다.

부득불 나는 그해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간 신설공장의 가동 중지를
지시하고 보유하고 있던 기술진들을 총동원해 문제점 보완에 나서는
한편으로 열명의 기술진들을 일본으로 파견해 경쟁사들의 문제점
해결방식을 알아오도록 했다.

그 때 그 설비들은 일본으로부터 기술지도를 조건으로 들여왔는데,장기간
이렇게 불량요인이 발생하자 그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 기술지도진이 몰래
야반도주를 하기도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불어닥친 1차 오일파동으로 인한 생산비의
증가는 나를 더 이상 헤어나오기 힘든 궁지로 내몰았다.

여기에 유리에 우유빛 색소를 넣은 모조 파이렉스가 출현하면서 6월이
되니 무려 1년분의 재고가 누적되었다.

이렇게 신공장 증설에 따른 부담에 판매부진까지 겹치니 행남사의
부득일 조업을 중단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