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의 최고학부는 성균관이었다. 왕조의 수많은 지도자를 양성해온 이
국가기관은 "대인지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태학"으로도 불렀다. 태학의
이념은 "성균"이라는 명칭에 잘 드러나 있다.

성은 성취하지 못한 인재를 성취시킨다는 뜻을, 균은 고르지 못한 풍속을
고르게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쉽게 말해 태학은 학문과 인격의 도야를 목표로 삼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조선조가 전체군주사회였다고 해서 젊은 지식인인 태학생들이 사회참여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정의에 입각, 잘못된 일이 벌어질 때는
신념에 따라 군왕에게도 맞서 싸웠다.

실력행사도 서슴치 않았다. 불교의 잔재를 씻어버리고 유교가 국가의 이념
으로 확립되기까지에는 태학생들의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다.

중종5년 태조의 비 신덕왕후의 원찬인 정릉사에 윤대비가 내관들을 보낸
적이 있었다. 이때 기다리고 있던 유생들이 내관들을 흠신 두들겨 패고
정릉사에 불을 질러 5층사리각을 소각한 사건이 일어났다.

중종은 이 사건이 "군왕을 능멸하고 대비를 모욕한 것"이라고 진노해
태학생 21명을 하옥시켰다.

태학생들은 옥에서 단식하면서 뜻을 했다. 대간과 삼공, 정원의 대신들이
모두 유생을 죄줄수없다고 사직하고 나섰다.

태학생대표 손란직은 "사찰의 화재는 천백년의 쾌사요 유교의 경사일뿐
아니라 종사의복"이라고 반박상소를 올렸다.

상소에서는 또 "한두명의 광망한 태학생이 저지른 일로 유생들이 형벌을
받는다면 정도를 억압하고 사도를 옹호한 죄를 군주가 후세에 지게 될 것"
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주동자 몇명을 제외하고 태학생들이 곧 풀려난 것은 말할것도 없다.

태학을 "수선의 자리"(수선지지)라 하여 순수한 선의 기준으로 이해했고
"공론이 있는곳"(공론지소재)이라 하여 정당한 여론이 있는 곳으로 인정하며
태학생을 "선비를 대우하는 예"(대사지례)로 존중하고 보호했던 조선조의
부럽기짝이없는 이야기다.

한동안 뜸했던 대학생들의 폭력시위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 북핵문제
노사문제로 가뜩이나 어수선한 우리사회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조선조의 군왕과 태학생이 극단적인 대립을 피할수 있었던 것은 태학생은
비판적인 언론은 펼수 있으나 정책의 결정은 군왕이 한다는 서로의 명확한
한계가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대학생과 정부도 각자의 한계와 가능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승인
하는 풍토가 아쉽다. 학생들이 "고독한 군중"이 되도록 내버려두어서도
안되겠지만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드는 "젊은이의 치기" 역시 반사회적
이라는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