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귀원 < 국립중앙도서관 고전운영실장 >

인구가 급속히 증가함에 따라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 남녀들이 많은 탓인지
요즈음은 예전처럼 특별히 계절을 가려 혼례를 하기는 힘들어진 세상인것
같다. 실제로 주변에서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가리지않고 결혼하는
많은 연인들을 볼수 있다. 그래도 역시 화창한 봄날의 신부가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봄이라는 계절이 주는 새로움과 화사함 때문인가 보다.

예부터 우리 국민들은 일생을 통해 겪게되는 큰 의례인 "관혼상제"를
지성껏 치렀다. 때로는 정성을 다한다는 마음이 지나쳐 분수에 넘치게 사치
스럽고 형식에 얽매여 그로인한 폐단도 없지 않았지만 이러한 의례를 통해
우리의 소중한 정신적인 유산이 면면히 이어져왔음을 부인할수 없을 것이다.

이제 시대가 바뀌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생활양식으로 인해 관혼상제의
허례허식은 우리주변에서 거의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미혼남녀에게
행해졌던 성인식인 관례는 사라진지 오래고, 상례 제례등도 현실에 맞게
많이 간소화되었지만 무슨 까닭인지 유독 혼례만은 해를 더할수록 사치
스럽고 형식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호화혼수는 물론 누가 만들어낸 풍속인지 야외촬영을 비롯 복잡한 절차들이
속속 새로 생겨나 결혼식이 경건함과 축복속에 치러지는 의식이라기 보다는
어수선한 하나의 행사가 되어버린 것 같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고궁등에 가면 야외촬영을 위해 한껏 성장하고 나온 신랑신부들을 마주치게
된다. 어느 쌍이나 카메라맨의 지시에 따라 때로는 장난스럽고 더러는 애정
표현이 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구경하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우스꽝
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간 많은 결혼식에 참석하며 감탄이 저절로 나올만큼 아름다운 신랑신부도
보았지만 가장 인상깊게 남아 있는것은 프랑스 유학시절 알게 됐던 게이코의
결혼식이다. 게이코를 만난곳은 어학학교에서 였는데 활달하고 개방적인
유럽이나 남미학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성적인 나와 게이코는 쉽게
친해졌다.

일본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서양사를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은
게이코는 차분하고 이지적인 여성으로 프랑스 남자친구 위베르와 결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구청에서의 간단한 혼인신고후 가까운 친지를 초대한 게이코와 위베르의
결혼식이 소르본대학 근처 작은 교회에서 7월초에 거행됐다.

결혼식이 행해진 때가 여름 바캉스의 시작무렵이라 두사람의 결혼피로연은
모두들 바캉스에서 돌아와 다시 일을 시작하는 9월초의 어느 주말로 계획
되었다.

피로연은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두 사람의 결혼
피로연에 참석해 주십사하는 초대의 말이 적힌 카드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
되었다. 파리에서 남쪽으로 70km 정도 떨어진 시골마을에 있는 위베르의
누이집이 피로연의 장소였다. 당시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나를 위해 게이코
는 자동차편까지 마련해 주는 세심한 배려를 했다.

오후 4시께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하객들은 정원에 자연스럽게 앉거나 서서
신랑신부와 이야기도 하고 초면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만찬은 거실과
식당에 뷔페식으로 차려졌다.

나이드신 분들을 위해서는 식탁을 마련해 앉도록 했고 젊은이와 아이들은
아무데나 편한대로 어울려 앉아 먹었다. 밤이되자 정원에 불이 밝혀지고
춤을 출수 있도록 음악이 흘러 나왔다. 물론 그날의 주인공인 게이코부부가
제일 먼저 춤을 추고 다음엔 원하는 사람 모두가 즐겁게 뒤섞여서 추었다.

아이들을 위한 곡도 틀어주어 아이 어른할것 없이 모두 오리흉내를 내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온 집안을 열을 지어 돌아다니기도 했다. 흥겨웠던
피로연은 밤이 이슥해서야 끝나고 모두들 새로 탄생한 신랑신부에게 축복을
보내며 떠났다.

누구와 닮았다는 말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추구하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두사람에게, 그리고 참석한 모두에게, 오랫동안 추억으로
남을만한 아름다운 혼례에 초대해 줄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