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당 박세화(1834~1910)는 1910년 7월27일(음력)음성 창골에서
경술국치소식을 전해 듣고 문인들에게 "도맥이 영원히 끊어졌으니
하루라도 구차스럽게 살 수 없다"는 자신의 결의를 밝히고 단식을
시작했다.

단식3일째 되던날 큰아들과 문인들이 밥상을 들고 들어가 울면서
권했지만 의당은 "내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다시는 권하지 말라"고
강경하게 뿌리쳤다.

4일째는 문인 임기정이 의리에 대해 질문하자 강론 하는것이 물흐르듯
했다. 그리고 다시 음식을 들기를 권하는 아들 형교에게 "내가 지금
죽으려는 것은 살려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이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꾸짖었다.

6일째 되는날 수제자인 회당 윤응선이 스승의 손을 잡고 통곡하며
차마 떠나지 못하자 오언절구 한수를 지어주어 이별의 정표로 삼게했다.

"도가 망하니 내가 어찌하겠느냐/하늘을 우러러 한바탕 통곡하노라/
자정하여 성현에게 내 몸을 바치려 하니/오호라 그대들은 미혹되지 말라"
(도망오나하 앙천일통곡 자정헌성현 오호군막혹)

9일째로 접어들자 의당은 부축을 받아 의관을 정제하고 붓을 잡아
"예의조선"사대자를 쓴뒤 "우리 당당하고 바른 나라가 짐승같은 놈들
때문에 망했으니 슬프다. 차마 말조차 못하겠다"면서 흐느꼈다.

12일째까지 강설을 그치지 않던 의당은 13일째부터는 기력이 떨어져
무엇을 물으면 턱만 끄덕이다가 곡기를 끊은지 26일째되던날 아침8시께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벼슬이라고는 해보지도 않은 한사람의 도학자가 의리를 지키기위해
자진해 가는 모습을 "의당집"은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해 놓고는 의당이
세상을 떠나기 전날밤 지진이 일어났고 운명할때는 안개가 주위를 뒤덮었
다고 장엄하게 끝맺고 있다.

스승없이 독자적으로 한 학파를 이룬 의당은 함남 고원태생이다. 의당은
도토리와 고구마를 양식으로 삼았을 만큼 어려웠지만 그가 가는곳마다
주민들이 교화되고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천부적으로 스승의 자질을 타고
난 탓이었는지 그가 월악산 용하수에서 강학할때마다 아낙네들까지 문밖에
몰려와 강의를 듣고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곤 했다고 전한다.

의당의 절필 "예의조선"을 글자 그대로 풀이한다면 "예의와 의리를 아는
조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4글자는 전통도학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실로 의미심장한 뜻을 지니고 있다.

중국을 포함한 온 세상이 오랑캐에 의해 지배당했지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최후의 보루가 바로 "조선"이라는 믿음과 역사인식에서 나온 것이
"예의조선"이다.

조선이 망했으니 도가 망했다는 논리나 도맥이 끊겼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이해가 쉬워진다. 의당은 "예의조선"이란 4글자속에
"예의"라는 우리 전통문화의 가치와 "조선"이라는 한민족의 국가를
되찾아야 한다는 명제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제시해 놓고 순국했다. 아니
순도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흘뒤면 48회 광복절을 맞는다. 나라를 되찾은지도 반세기가 가까워
온다. 그렇지만 그 나라라는 것이 아직은 반쪽이다. 조금 잘살게
됐다고는 해도 그것을 위해 발버둥 치는 동안 잃은 것도 한 두가지가
아니다.

사회는 여전히 뒤죽박죽이다. 그래서 "개혁"이란 말이 지금도 유행처럼
나돌고 있다. 예의.염치는 땅에 떨어져 교육자도 사업가처럼 돼 버렸다.
아무도 스승을 존경하려 들지 않는다.

근검절약하던 미풍은 사라져 버리고 과소비풍조만이 휩쓸고 있다.

학문과 인간, 지식과 행동이 전혀 일치되지 않고 아무도 물질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려 들지 않는다.

80여년전 의당이 "도가 망했다"고 한 말이 지금도 실감나게 들린다.

신한국의 광복절은 전통문화의 계승이란 차원에서 국내 곳곳에 숨어살며
국민들과 함께 극일하다 사라져간 전통도학자들의 끈질긴 민족보전의지에도
관심을 기울여보는 뜻깊은 기념일이 되었으면 한다.

<부국장대우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