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여의도 럭키금성빌딩 소강당에서는 색다른 행사가
베풀어졌다. 이름하여 자율경영을 위한 각서조인식. 그룹총수인
구자경회장과 계열사사장이 마주앉아 각서에 각각 도장을 찍었다.
사장은 "경영비전에 따른 과제를 꼭 달성할것을 서약"했고 회장은 "이를
지원키위해 사장의 자율경영을 보장"했다.
관계회사의 임원이 배석한 이 조인식은 폐쇄회로를 통해 전직원들에게
공개됐다. 국외자에게는 어색한 장면이었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진지하기만
한 이같은 행사는 벌써 3년째 계속되고 있다.
자율경영의 핵심은 세가지 사항을 빼고는 모두 전문경영인인 사장에게
맡기는 것이다.
세가지는 증자,사장에 대한 평가,사장후계자의 선정이다.
따지고 보면 대주주 고유의 기능들이다. 이밖에는 모두 사장이 알아서
한다. 몇백억원이 들어가는 투자도 사장책임아래 이뤄진다.
이에따라 같은 계열사간 거래도 시장가격으로 이뤄지고 가격이 맞지
않으면 외부에서 구입하는 일도 생긴다.
모든것이 사장책임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경영에 대한 책임도 사장이
진다. 그러나 나타난 실적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룹의 경영비전에 맞게 회사를 끌고 가느냐를 가늠하는 리더십,회사의
영속성을 유지하는 후계자양성,경영성과인 이익등 3가지항목을 똑같은
비중으로 평가한다. 상황에 따라 노사문제가 가감된다.
사장은 1년에 2번 회장과 만나 서로의 경영방향을 조율하는 이른바
컨센서스 미팅(Consensus Meeting)을 한다. 이 미팅에 걸려 자리를 물러난
사장이 있으며 경영성과때문에 사직한 이도 몇명있다. 자율경영이
실시된후 사장들은 더욱 가시방석에 앉은 셈이다.
자율경영의 성과를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른것 같다.
그룹측에서도 "만족할 수준에는 안왔으나 이 운동의 취지를 전임직원이
알고 열심히 하는 단계"라고 평하고 있다.
자율경영을 이 그룹은 경영혁신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운동을 시작한 동기에 대해 구회장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직
이길밖에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 그룹의 경영혁신운동은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실질적으로는 자본과
경영의 분리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
그래서 짧은 우리 경영사에서 의미있는 운동으로 평가될만하다.
자본과 경영의 분리는 금과옥조는 결코 아니지만 나아가야할 방향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세월이 필요하다. 정부가 강제로 할수도 없고 할
성질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해답은 간단하다. 우선 "쉬운것부터 한걸음씩"이다. 그런
뜻에서 재계는 이 운동을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같다.
소유.경영의 분리는 우수한 전문경영인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전문경영인은 1차로 오너가 키워야 하지만 정부와 사회가 이를
뒷받침해줘야 가능하다.
예를들면 소유.경영의 분리를 외치는 정부가 실제로는 전문경영인을
제치고 오너만 상대하려는 구습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자가당착이기도
하다.
사회도 전문경영인들에게 걸맞는 대우를 해줘야 한다.
오늘의 최고경영자들은 대부분 20 30년동안 밤을 낮삼아 코피흘리고 뛴
사람들이다.
관리들보다 훨씬 우수하고 국제 감각도 앞서있다. 그리고 덜 부패했다.
당연히 우리사회의 리더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사회적으로 대접을
못받는것은 역시 경영의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것 같다.
쉬운말로 바꿔 사장은 아무나 시키면 할수있는것이란 인식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다. 퇴물 관리가 낙하산식으로 사장자리에 앉는 것이 통하는
사회이다. 대학을 졸업해 수십년간 한 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
경영인이 대부분인 일본과 경쟁해 이만큼 따라가는 것도 따져보면
전문경영인들의 숨은 공이라 할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사회는 그동안
이들에게 너무 인색했다.
그러나 전문경영인(물론 전문성을 갖춘 오너도 포함)의 시대는 이미
와있고 이같은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더 늦기전에
자율경영을 시도해보는 것이 어떨지,오너들에게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