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동의 빵집이야기] 악소! 브룃헨…"독일인들이 한국 오면 가장 먼저 찾는 곳"
밥 대신 빵. 우리는 지금 '빵의 시대'를 살고 있다. 주변엔 빵에 대한 관심을 넘어 직접 빵집을 차리겠다는 사람도 부쩍 늘었다. 빵집은 도처에 널려 있지만 어떤 빵집을 어떻게 차려야 할 지 궁금한 게 많다. 셰프만의 개성으로 '골리앗'을 넘어뜨린 전국 방방곳곳 '작은 빵집' 사장님들의 성공 방정식. [노정동의 빵집이야기]에서 그 성공 법칙을 소개한다.

독일 사람들이 한국에 오면 가장 먼저 찾는다는 곳이 있다. 서울 한남동에 있는 빵집 '악소(Ach So·독일 말로 '아하!'라는 감탄사)'다.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건축학 대학원 과정을 밟다가 독일 빵에 '꽂혀서' 학업을 뒤로한 채 제빵사의 길로 들어선 이 빵집 허상회 대표(49)는 20년째 전통 독일 빵만을 고집하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브룃헨(brotchen)' 전문가다.

브룃헨은 독일 말로 '작은 빵'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보통명사다. 브룃헨은 독일 사람들이 주식으로 삼는 기본 빵이다. 유럽에선 브룃헨을 이해하는 것이 곧 독일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밀가루, 잡곡, 호밀을 주재료로 삼는 이 빵이 농경문화 토대 위에서 만들어졌던 독일문화를 잘 표현하기 때문이다. 독일 사람들은 이 빵 안에 햄, 치즈, 살라미 등을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섞어 먹는다.

독일은 일본과 함께 글로벌 제조업 수출 강국으로 꼽힌다. 다른 유럽 선진국들이 금융과 IT 기반의 산업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하는 동안 그들은 여전히 선진국을 대상으로 하는 소비재 수출로 먹고 산다. 오랫동안 그들을 지배했던 농경문화의 영향, 즉 굳이 필요하지 않으면 바꾸려고 하지 않는 '느림의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독일 빵의 특징과도 잘 연결돼 있다.

독일에서 소비되는 빵은 특색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바게뜨를 제외한다면 화려하고 독특한 재료를 쓰는 것이 미덕인 프랑스빵과 대조적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흰 쌀밥을 먹듯 독일 사람들은 브룃헨을 먹는다. 햄, 치즈 등은 우리나라 식사문화에서 반찬과 같은 역할을 하는 재료들이다. 저녁식사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독일에서 빵은 주식이자 간식이다.

허 대표는 "독일 여러 지방에서 생산되는 잡곡류와 호밀, 밀가루가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 수천가지의 브룃헨을 만들 수가 있다"며 "독일에선 빵이 간식이 아니라 주식이자 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에 한국의 쌀밥처럼 일관되고 예상 가능한 맛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인들이 밥을 주식으로 삼듯 독일 사람들은 브룃헨을 달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우리나라 빵에서 많이 사용하는 기름, 설탕 등을 반죽에 섞지 않는다. 또 버터와 마가린도 배제한다. 우리가 흰 쌀밥에 조미료를 섞지 않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는 게 허 대표의 얘기다.
[노정동의 빵집이야기] 악소! 브룃헨…"독일인들이 한국 오면 가장 먼저 찾는 곳"
독일 빵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일관된 맛이다. 독일 안에서는 오랜 기간 똑같은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느냐가 좋은 빵집의 기준으로 통한다. 연금, 사회보장제도, 직업학교 문화가 잘 발달돼 있는 독일에선 유독 대(代)를 이어 빵집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허 대표의 얘기다. 그들이 자녀들에게 빵집을 물려줄 경우 최고의 가치로 삼는 건 바로 일관된 맛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에선 빵집 안에 매대라는 개념이 없다. 빵집에 들어와 소비자가 어떤 빵을 살지 구경하고 시식을 할 수 있게 해놓은 우리나라 빵집 문화와는 좀 다른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선 빵이 간식으로 소비되기 때문이고 독일에선 주식으로 소비되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흰 쌀밥을 굳이 시식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독일에서 빵은 소비자가 가장 구경하기 어렵고, 판매자가 가장 팔기 쉬운 곳에 놓여 있다.

독일 본토에서나 느낄 수 있는 맛 때문에 이 빵집은 국내에 들어와 있는 독일 기업들, 대사관, 각 대학교 독어독문과 교수들과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곳이다. 벤츠(Benz), BMW, 지멘스(SIEMENS) 같은 독일 기업들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곳에서 빵을 대량으로 구매한다. 독일 대사관에서는 한국 사람들에게 독일의 '진짜' 문화를 알려주고 싶을 때 브룃헨을 사간다고 한다. 독문과 교수들은 학생들로부터 '독일은 어떤 곳인가'라는 질문을 받기 전 미리 이 빵 맛을 보여준다.

일반 고객에게 판매하는 빵의 양보다 독일 사람들이나 혹은 독일에 살았던 한국 사람들의 수요가 훨씬 많다고 그는 귀뜸했다. 하지만 기자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20~30대 여성들을 중심으로 브룃헨은 계속 팔려나가고 있었다. 이 빵집에 자주 온다는 신영미씨(27·서울 강남)는 "브룃헨은 기름지지 않고 먹은 뒤에도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 없어 식사대용으로 즐겨 찾고 있다"며 "기본 빵 안에 치즈, 햄 등으로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어서 자주 찾게 된다"고 말했다.

허 대표는 오히려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추지 않았던 것이 성공 비결이라고 말했다. 그는 "빵을 처음 독일에서 접했고 그곳에서 배웠기 때문에 한국의 제빵문화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며 "우리나라에서도 점차 빵을 주식으로 삼는 소비자들이 늘면서 독일식 식사 빵에 대한 수요도 함께 늘어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노정동 한경닷컴 기자 dong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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