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해외여행 비용 줄고, 직구 더 싸게…직원들 "올 여름이 행복해요"
‘회사는 죽을 맛인데, 직원들은 신났다.’

한 수출 대기업 재무팀에 다니는 신 대리가 최근 느낀 회사 분위기다. 작년 이맘때 달러당 1150원이던 환율이 최근 1010원대까지 떨어지면서 회사에는 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직원들은 ‘위기 경영’에 동참하면서도 속으로는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고 있다. 환율이 떨어진 김에 해외 여행을 결심한 것이다. “작년 기준으로 정해진 올해 성과급이 당장 줄거나 하진 않으니 해외 여행 다녀올 만하죠.”

환율 때문에 희비가 엇갈리는 직장인이 많다. 원화 강세를 즐기며 느긋하게 해외 여행을 계획하는 김 과장이 있는 반면 해외 펀드에 쌈짓돈을 투자해 놓고 발을 동동 구르는 이 대리도 있다. 이제 외환 마감 차트를 보는 것은 직장 생활의 기본이 됐다. 저환율 시대를 직장인들은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1년 전 바꿔 놓은 달러에 한숨만

증권사에 다니는 김 대리는 떨어진 환율 차트만 보면 한숨이 푹푹 나온다. 그는 작년 6월 원·달러 환율이 1100원 정도일 때 500만원가량을 달러로 환전했다. 미국으로 가족여행을 가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부인이 둘째 아이를 임신하면서 연기됐다. 이후 증권업계 구조조정의 파도(?)를 넘느라 1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이제 환율은 1000원 초반대까지 떨어졌고, 김 대리는 가만히 앉아서 50만원을 날렸다. “명색이 증권사 직원인데 눈뜬 채 10%를 손해봤다는 게 부끄럽습니다. 앞으로 환율이 더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데 지금이라도 팔아야 할까요?”

종합상사에 다니는 김 부장은 사내에서 ‘재테크 고수’로 통한다.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수익을 내는 게 그의 특기다. 그가 주목한 투자 대상은 다름 아닌 ‘달러’. 여유가 생길 때마다 조금씩 사 모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뒤 미국 중앙은행(Fed)의 양적완화로 달러 가치가 급락할 때도 믿음이 있었다. 직장 동료들에게 “금값이 많이 오르고 중국 위안화가 뜬다고 하지만 절대 달러의 글로벌 기축통화 자리를 빼앗을 수 없다”고 설교했다. 미국 경제만 살아나면 달러 가격이 급반등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런 그는 요즘 ‘멘붕’ 상태다. 미국 경제는 회복되고 있지만 달러 가치가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종합상사에 입사한 김모 사원은 원화 강세에 비싼 수업료를 냈다. 환율이 떨어지면서 원래 받으려고 한 금액을 못 채우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원·달러 환율이 1040원가량일 때 원화로 한 품목을 들여왔다. 그러나 최근 이 품목을 수출하고 돈을 받을 시점이 되자 환율이 1020원대까지 떨어졌다. 환율 때문에 밑지는 장사를 하면서 상사들에게 질책도 많이 받았다. 김씨는 요즘 선물환 등을 활용해 환율 변동 위험을 줄이고 있다.

힘들었던 유학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대기업에 다니는 강 부장은 요즘 환율이 떨어진다는 뉴스를 보면 미국 유학 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뒤숭숭했던 2000년대 후반. 정부가 수출 확대를 위해 고환율 정책을 펴면서 원·달러 환율이 한때 1600원에 육박하기도 했다. 갑작스레 학비와 생활비가 실질적으로 50% 넘게 올라 주변 한국인 유학생 중 상당수가 ‘강제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강 부장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각고의 노력으로 버텼다. “마트에서 싼 맛에 우유와 빵을 사 먹었는데 맛이 이상해서 보니 지방이 거의 없는 우유더라고요. 그냥 잘못 고른 것이었는데도 엄청 씁쓸했죠.” 당시 ‘눈물 젖은 빵’을 먹던 그는 올여름 휴가 때 미국 유학지를 다시 찾아 환율 걱정 없이 달러를 써볼 생각이다.

1년간의 미국 연수를 준비 중인 이 차장은 요즘 남몰래 웃음을 짓는다. 이 차장이 연수를 떠나기로 확정된 작년만 해도 1100원을 넘던 원·달러 환율이 대폭 떨어졌기 때문이다. “연수 때 생활비로 쓰려고 마련해 둔 비용 중 최소 10%는 줄일 수 있게 됐어요. 가만히 앉아 소득이 10% 늘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죠.”

미디어 관련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 과장은 남편과 티격태격한 지 몇 주 만에 터키로 여름휴가를 가기로 했다. 대학생 시절부터 배낭 하나 메고 온갖 오지를 돌아다녔던 그다. 얼마 전 카파도키아를 찍은 사진에 그만 ‘훅’ 꽂혀버렸다. 남편은 아이도 아직 어린데 제주도나 남해에 있는 리조트에 가서 쉬다 오자고 했다. 꼭 터키를 가보겠다는 마음에 이리저리 설득해봤지만 남편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김 대리는 여행경비를 계산한 종이를 들이밀며 말했다. ‘여보 요새 환율이 얼마나 떨어진 줄 알아?’ 계산서를 본 남편은 그날로 터키 여행에 동의했다.

신나는 해외 쇼핑족

자산운용사에 다니는 김모 사원은 올여름 휴가를 미국 뉴욕에서 보낼 계획이다. 이번 휴가의 콘셉트는 친구 4명과 함께하는 행복한 쇼핑.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 즈음에 많은 브랜드가 세일한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11월 말 미국 블랙프라이데이보다는 할인율이 낮지만 여행가는 김에 쇼핑까지 하고 올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닐까요.”

몇 달 전 ‘사이클족(簇)’이 된 박 대리. 최근 자전거 카페를 통해 중국 알리바바에서 운영하는 해외 직구 사이트 ‘알리 익스프레스’를 알게 됐다. 사이트에 한 번 접속해 보고 나선 눈이 휘둥그레졌다. 5달러짜리 자전거 장갑부터 30~40달러짜리 헬멧까지 없는 게 없었다. 중국 기업이 운영하는 사이트라 ‘위안화로 결제를 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달러 결제도 가능했다. “제품이 싼 데다 환율까지 유리해서 신이 났죠. 시간이 지나고 보니 긁은 돈이 장난이 아니네요.”

김대훈/황정수/강현우/임현우/김동현 기자 daep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