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매 맞는 남편, 중세엔 '동네 왕따'
1668년 프랑스 리옹에서 수레 제조장을 운영하던 과부 플로리는 자신이 고용한 젊은 마차꾼 티세랑과 재혼한다. 결혼식 날 마을 청년 30~40명이 신혼집으로 몰려가 악기와 주방기구, 작업도구 등을 두드리며 소란을 떤다. 야유와 조롱을 퍼붓고, 노래를 부르며 연방 ‘샤리바리! 샤리바리!’라고 외친다.

《샤리바리》는 중세 이후 유럽 사회에서 널리 행해지던 ‘샤리바리’의 문화인류학적 의미와 역사적 변천 과정을 깊이있게 분석한다. 저자는 ‘샤리바리’를 “공동체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문제를 일으킨 대상을 소란과 조롱, 폭력 등으로 처벌하는 유럽의 민중적 관행”이라고 정의한다.

샤리바리의 출발점이자 가장 중요한 제재 대상은 성 일탈이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토태가 성 규범이기 때문이다. 근친상간, 간통뿐 아니라 공동체의 존속을 의미하는 출산을 저해할 수 있는 재혼과 불임,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질서를 위협하는 ‘매 맞는 남편’도 샤리바리의 대상이었다. ‘플로리 부인’ 사례는 가장 약한 수준의 샤리바리다. 기물 파괴나 구타 등 신체적·물리적 폭력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샤리바리는 근대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정치·경제적 권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으로 변모한다. 중앙 집권화와 공권력 강화, 개인주의, 사유 재산, 합리주의 등 근대적 시스템이 샤리바리의 정신인 공동체주의와 충돌했기 때문이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