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찰리가 누구야.”

1995년 초 어느날 미국 백악관. 빌 클린턴 대통령이 자리를 비우자 참모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찰리’라는 이름이 붙은 보고서 때문이었다. 클린턴은 어느날부터인지 이상한 보고서를 들고 나타났다. 이를 기초로 정책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워싱턴에서 힘깨나 쓴다는 백악관 참모들이 볼멘 소리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생활을 바꾼 정치의 힘

얼마 뒤 이 보고서를 만든 주인공이 밝혀졌다. 정치컨설턴트인 딕 모리스. 과거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에 출마했을 때 선거운동 책임자였다. 대통령이 된 클린턴은 상황이 심각해지자 한동안 떨어져 있던 모리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클린턴의 민주당은 몇 달 전(1994년) 중간선거에서 패했다. 공화당은 40년 만에 처음 상·하원을 모두 장악했다. 클린턴이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란 말까지 나왔다.

클린턴은 백악관 참모들 몰래 모리스를 만났다. 기존 참모들에게 자극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모리스는 여론조사 전문가 마크 펜을 동원, 치밀하게 여론흐름을 살폈다. 그들이 찾아낸 핵심 개념은 ‘사커 맘’. 아이들을 축구클럽에 데려다주는 중산층 엄마란 뜻이다. 모리스는 여론흐름을 돌려놓는 것은 물론 클린턴 재선을 위해서도 이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모리스는 다양한 정책을 만들어 냈다. 세금감면 등 대형 정책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책은 교복착용, 아이들의 통행금지 시간 설정, 미성년자가 볼 수 없는 TV프로그램이 나오면 소리가 나는 칩 부착, 대학 학자금 지원 등 ‘생활밀착형’이었다. 사커맘들의 삶을 파고든 것이다. 당시 언론은 클린턴의 정책에 ‘스몰 딜’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전략은 적중했다. 미국인들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정책에 공감했다. 1996년 말 클린턴은 재선에 성공했다.

이번에는 우리나라 얘기다. 지난 4월 총선 때다. 개표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민주통합당의 우세를 점쳤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새누리당은 과반의석을 다시 확보했다. 선거 며칠 후 한 정치 컨설턴트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야당의 패배원인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유권자들이 야당에서 생활과 미래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생활과 미래는 밀접히 연관된 말이다. ‘저 사람을 찍으면 내 생활이 어떻게 변할까’라는 유권자들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그랬을까. 그랬다. 당시 야당의 공약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공약집은 냈지만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다수당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인지도 일관되고 분명하게 전하지 못했다. 대신 선거운동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야당은 제주도 강정마을로 달려갔다. 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투쟁이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도 중요한 이슈로 내세웠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비판했다. 강정마을, 한·미 FTA, 현 정부의 실정이 사소한 이슈는 아니다.

반대와 규탄의 실패

하지만 세 가지 이슈의 공통점은 ‘반대와 규탄’이었다. 야당의 선거운동에서 ‘생활과 미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국민들에게 다가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통령 선거가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게 분명하다. 이 경쟁에 앞서 한 정치인의 말은 되새겨 볼 만하다. “정치는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와 국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번 대선이 ‘누가 더 국민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인지’를 놓고 벌이는 경쟁이 됐으면 하는 어리석은 기대를 해본다.

김용준 국제부 차장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