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당국이 물가를 잡는다? 그런 전례가 없습니다. "

경쟁법 분야 전문가인 정갑영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와 할버트 화이트 UC샌디에이고 교수가 '경제위기 상황에서 경쟁당국의 역할'을 주제로 지난 8일 연세대 정 교수의 연구실에서 마주앉았다. 화이트 교수는 연세대가 SK그룹의 지원을 받아 초빙했으며 15일 한국에서 계량경제학 관련 강연을 할 예정이다.

정 교수와 화이트 교수 모두 경쟁법 분야의 권위자다. 계량경제학이 전문 분야로 공정거래를 저해하는 행위,예를 들어 카르텔로 인한 피해액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측정하는 연구 등을 주로 하고 있다.

화이트 교수는 미국 정부가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비타민 가격 담합 건으로 글로벌 제약업체들을 상대로 총 8억9950만달러의 과징금을 매길 때 피해액 규모를 산출하는 데 일조했다. 당시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던 호프만라로슈는 가격 담합으로 수조원의 벌금을 냈고,사회적 비난 여론과 매출 감소 등에 시달리다 결국 비타민 사업에서 손을 떼야 했다.

두 교수 모두 공정거래위원회가 카르텔 적발 등을 통해 시장 참여자들의 공정 경쟁을 유도하는 가이드 역할에서 벗어나 최근 대형 유통업체들에 압력을 가해 납품업체들이 내는 수수료 인하를 이끌어내는 등의 방법으로 물가를 잡으려 하는 것에 대해선 부정적 의견을 피력했다. 화이트 교수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삼성전자 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서 카르텔 명목으로 거액의 과징금 제재를 받는 것이 또 다른 무역장벽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선 "정부 영역의 일은 대답하기 힘들다"며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정 교수=한국의 8월 물가 상승률은 5.3%였다. 정부는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공정위가 최근 기름,설탕,대학등록금 등을 카르텔 명목으로 조사하고 과징금을 매겨 물가를 잡으려 한다.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화이트 교수=분명한 것은 카르텔이 물가를 올릴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물가당국은 한국은행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경쟁당국(competition authority · 각국에서 공정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부처)의 역할은 한은의 역할을 보완하는 수준에서 그쳐야지 그것을 대체해선 안된다.

▼정 교수=개인적인 의견으로 보자면 공정위가 물가를 잡으려고 해도 이에 대한 정밀한 가이드라인이 없는 것이 문제다. 예컨대 석유시장은 4개 정유회사의 독과점으로 이뤄져 있지만 교육은 그렇지 않다. 시장마다 여건이 다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일괄적인 기준으로 이 모든 분야를 규제하려고 한다. 부작용이 있을 것이라고 보지 않는가.

▼화이트 교수=1970~1980년대 미국에 오일쇼크가 왔을 때도 물가를 잡을 수 없었다. 물가에 대한 규제가 먹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시장은 물가당국보다 주변 경제상황에 대한 정보를 더 빨리 받아들이고 더 빨리 움직이기 때문이다. 억지로 물가를 잡으려고 하면 세 가지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다. 우선 암시장이 생길 수 있다. 둘째,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가진 제조업자가 있으면 그들이 제시한 가격을 정부가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셋째는 제조업자가 정부의 물가기준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품질이 낮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 교수=공정위의 또 다른 화두는 중소기업 보호다. 최근 공정위는 대형 유통업체가 중소기업으로부터 받는 수수료를 인하하도록 했다. 또 중소기업의 납품단가를 과도하게 깎는 대기업에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마련됐다. 일각에선 중소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은 좋지만 그들의 자생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화이트 교수=규제당국은 경제가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기 쉽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기업과 개인들이 그런 규제를 전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걱정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규제를 피해 암시장을 만들고 이면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 규제를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사례다. 수수료 인하와 같이 결과물을 고정시키지 말고 세금을 비롯한 다른 인센티브로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도울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방법을 권하고 싶다.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건 한국의 경쟁당국(공정위)이 국내 이슈에만 치중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물론 공정위가 인텔과 퀄컴 등 세계적인 기업의 불공정행위에 대해 무거운 과징금을 물린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외에도 각종 원자재 가격에 대한 담합이 전 세계적으로 이뤄지고 있고 한국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 교수=좋은 지적이다. 문제는 그같은 각국의 경쟁당국 규제가 또 다른 무역장벽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미국에서 삼성,LG디스플레이 등 한국의 제조업체들이 과징금 추징액 규모로 봤을 때 역대 10위 안에 들어간다.

▼화이트 교수=민간영역과 정부영역은 또 다른 분야라서 대답하기가 힘들다.

▶정갑영 교수

△1951년생 △연세대 경제학과 △미국 코넬대 경제학 박사(1985년)△연세대 경제학과 교수(1985년)△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장(1998~2004년)△연세대 원주캠퍼스 부총장(2006~2008년)△연세대 경제학부 교수(현)

▶화이트 교수

△1950년생 △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졸업(1972년) △MIT(매사추세츠공과대) 경제학 박사(1976년)△베이츠-화이트경제자문회사 설립 △구겐하임장학재단의 특별연구비(Guggenheim fellowship) 수상 △UC샌디에이고 석좌교수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