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鄭奎載)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

'배비장전'은 직업 공무원들의 노회한 생존 비법을 적나라하게 들려준다.

제주도 지방 이속(吏屬)들이 기생 아랑을 내세워 한양서 내려온 근엄한 배 비장(裵 裨將)의 위선을 벗긴다는 줄거리지만 역설적이게도 전문 행정 관료들이 어떻게 권력을 무력하게 만들고 개혁을 저지시키는지 이처럼 잘 보여주는 이야기도 없다.

"예~이~! 하며 목소리 높이는 아전 따위라고 쉽게 보지 마라.그들이야말로 등 뒤에 칼을 꽂는 자들이며,앞에서는 굽실거려도 뒤에서는 온갖 이권은 모두 틀어쥐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 반드시 거꾸로 읽어봐야 하는 배비장전의 골자다.

장원 급제해서 지방 수령으로 내려가봤자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일 뿐이요 더구나 임기라고는 고작 1년이다.

지방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토호 사림(士林)들을 찾아다니며 소속 파당과 족보를 따져 인사 다니다 보면 벌써 석 달이요,한양으로 돌아갈 준비에 다시 석 달이며 기생 점고에라도 맛들이면 볼장 다 보는 것이 장원 급제와 수령 행차의 본모습이다.

그러니 대대로 가업을 상속받아 지방 현지에 눌러살아야 하는 아전살이로서는 적당히 둘러대고 되도록이면 실정을 은폐하고 여기에 더해 고운 머릿결에 동백기름 바른 기생이나 붙여주며,돌아가는 길에 떡하니 공덕비 하나 세워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것으로 온갖 이권이며 백성들 등쳐먹는 일에서부터 문전옥답까지 필사적으로 지켜낸다.

이런 구조 속에서 배씨 성을 가진 행정 전문가가 어린 수령을 따라와 꼬장꼬장 따져대니 눈엣가시가 될 것이 뻔한 일이고,기생 아랑을 이용해 뒤주 속에 가둔 다음 혼쭐을 내주고 뒤탈 없이 버릇을 들여놓았더라는 스토리가 바로 배비장전이다.

'문민통치가 이미 자리잡은 데다 민주적 관료제도로 이행한 지 이미 60년'이라고도 자신하지 마라.계급장 떼고 맞짱뜨자던 노무현 정권 아래에서 더욱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들이다.

5년의 짧은 기간 동안에만도 수십 개의 장차관 자리를 새로 만들어냈고 어리석은 대통령과 귀 얇은 386들 구슬러 수만 개 책상을 새로 만들어낸 그들이다.

온갖 명분을 앞세워 만들어 낸 산하단체와 기관이 또 얼마인가.

새 정부 조직개편으로 오히려 살판 났다는 모 부처의 산하단체가 도대체 몇 개인지 그리고 노무현 정권 들어 몇 개나 늘어났는지 한번 세어보시라.그러니 문전옥답 가꾸는 데 천부의 소질을 가진 그들의 수완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행정 규제 줄이라면 여러 개 관련 법령을 하나로 묶어놓은 다음 규제수를 n분의 1로 크게 줄였다고 천연덕스럽게 보고해온 결과가 지금의 규제 천국이다.

또 순진한 국회의원들 기분 맞추어 주고 진짜 결정권은 몽땅 자기들 멋대로의 시행령에다 꼭꼭 숨겨놓는 것이 관료들의 실력이다.

공무원으로 잔뼈가 굵은 국장들만 해도 보직을 바꾸고 나면 어디에 무슨 규제가 숨어 있는지 알기조차 어렵게 된 것이 오늘의 상황 아닌가.

그러니 무식한 386이나 순진한 정치 교수들이 꽹과리 치고 나팔 불며 수령이랍시고 부임해보았자 배비장꼴만 났던 것이다.

관료 한 사람 한 사람이야 스스로도 관료주의를 개탄해 마지않는 선량한 시민이요 아침마다 국민의 공복될 마음으로 출근하지만 일단 청사에 들어서면 곧바로 아전살이의 오랜 전통에 기속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관료주의라는 괴물이다.

공무원 개개인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식민지가 줄고 있는데도 식민지청 공무원은 4배나 늘어났고 바다의 해군 수는 줄었는데 해군성 공무원은 2배나 늘어났다는 것이 영국 관료주의를 분석한 파킨슨의 법칙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지난주 국정홍보처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 여부에 대한 매우 철학적인(?) 질문을 던졌다지만 한국의 오랜 아전살이 전통을 생각하면 실로 쓴웃음이 난다.

그러니 이명박 당선인은 물론이고 정권 인수위는 부디 정신 바짝차리시라! 인수위 활동 며칠 만에 벌써 이런 저런 걱정이 생겨서야 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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