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전쟁 영웅 오디세우스는 교활하고 냉철하며 이기적이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자신의 기지로 빠져나간다.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족과 친구, 그리고 하인들은 오디세우스를 친절하고 자상한 인물로 회상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싫어하기 힘든 인간의 매력이 있다.

신(神)들은 오디세우스에 대하여 호불호가 엇갈리지만, 그는 온갖 고난 끝에 아들과 많은 구혼자에게 둘러싸여 고통받고 있는 아내 페넬로페가 있으며, 자신이 군주로 있는 고향 이타카 섬으로 돌아간다. 10년 만에 귀향이다.

오디세우스는 왜 중간중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을 뒤로하고 목숨을 걸고 귀환했을까? 아들 때문에, 아니면 아내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본능적인 귀향인가?

필자는 아들과 군주 자리와 아내는 조연이나 양념일 뿐이고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인간의 귀소본능(歸巢本能)에 따랐다고 본다. 모든 여행자나 추방당한 자가 고향을 향하는 것이 인간이 가진 본능적 애착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John William Waterhouse, Ulysses and the sirens 1891 / 출처 flickr
John William Waterhouse, Ulysses and the sirens 1891 / 출처 flickr
대만, 멀리는 인도네시아까지 가서 겨울을 난 제비는 봄이 오면 어김없이 금수강산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짝을 맺어 알을 낳고 새끼를 키워 찬바람이 불면 다시 긴 남쪽 나라 강남 여행을 떠난다.

긴 여행 과정에 몸무게가 반 이상 줄어든다. 귀향, 회복, 연락, 보호를 향한 새들의 울음소리는 인간에게 있어야 할 장소에 있다는 점에 안심하며 잠들 수 있게 한다. 지금은 개체 수가 많이 줄어들어 ‘보호 야생동물’이다. 따라서 놀부처럼 제비 다리 일부러 부러트리면 안 된다.

바다거북은 부화하면 바다로 내려가 수천 마일을 여행한다. 여행은 10년, 20년 동안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다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떠나온 길을 되짚어 태어난 바로 그 해변으로 돌아온다. 연어의 긴 여행도 만만치 않다.

새, 물고기, 벌, 나비 등의 거의 모든 생명체는 둥지, 구멍, 나무, 호수, 벌집, 언덕, 해변, 골짜기, 계곡 등 어는 특정한 한 장소에 대해 깊은 애착을 가지며, 그곳에서 활발하게 번식한다. 그런 장소를 우리는 자생지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그들의 고향이다.
▲ 모든 생명체는 태어난 곳을 향한다. 사회도 마찬가지, 정반합이다.
그러한 방향성이 없다면 미지의 영역을 항해할 방법이 없고, 길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스어로 귀환은 노스토스(Nostos)이고 알고스(Algos)는 괴로움을 뜻한다. 두 단어의 합성어인 노스탤지어는 지나간 시대나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병(鄕愁病)을 말한다. 향수란 돌아가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고향은 유년기에 첫사랑이고 무지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아무것도 몰라도 본능적으로 몸과 마음을 맡기면 되는 곳이다. 그래서 진정한 고향은 없다는 말도 하지만 실제 돌아갈 고향이 없으면 슬프고 불안하다. 내 인생의 근원이 사라진 것이다. 한국의 이산가족은 아직 8만 명 이상이 살아 계신다. 인간 등 모든 동물은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를 놓지 않고 산다.

그렇다. 고향으로의 귀환(nostos)이 우리의 가장 깊은 욕구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떠나온 장소로 돌아가든, 미래에 대한 바람으로 둥지를 틀고 성장할 수 있는 새로운 고향을 만들든 어쨌든 귀향을 위해 기꺼이 비싼 비용을 내고 고통도 감내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오디세우스가 겪은 귀향 모험담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산가족처럼 돌아가는 것이 항상 가능한 일은 아니다. 또 고향이 언제나 단 하나의 집이나 장소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 형태와 위치를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제2, 제3의 고향을 꾸준하게 만든다.

하지만 고향의 물리적 장소는 변해도 고향이 갖는 의미를 선택할 수는 없다. 고향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곳, 우리를 알아봐 주는 곳,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받는 곳이다. 고향을 가야 나의 과거가 보이고 현재가 드러나며 미래의 갈 길을 다듬는다. 고향으로 돌아가야 반성이 있고 고백이 있으며 화해와 용서가 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새롭게 출발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곳이다.

어떤 사회나 안정되어 시간이 조금 흐르면, 물이 고여 썩듯이 어지러운 현상들이 생기고 반발이 따르고 투쟁과 타협으로 바른 위치를 찾아간다. 정반합(正反合)이다. 이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진리에 접근하고, 보수와 진보가 무게의 추를 조금씩 달리하며 인류 문명도 조금씩 궤도 수정을 해나가며 고도화한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의 근현대사도 격동의 시간을 보냈다고 하지만 크게 보면 70년 동안 전쟁 등 없이 평화롭게 발전해왔다. 많은 사람이 지금 겪는 상식의 혼돈도 길게 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오염되고 비정상적인 상식들도 이제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고향에 가서 모든 것을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어린 시절 미지의 이상 을 향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아보며 재충전을 하는 곳이 고향이다.

컴퓨터도 껐다 다시 시작하면 현재 상태는 지워지게 된다. 에러가 발생한 잘못된 코드는 모두 사라진다. 모든 소프트웨어는 에러 코드가 없는 깨끗한 상태인 원래대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귀환의 추석은 우리를 초기화(reset)시켜 준다.

공자는 인간을 미완성의 존재로 보았고, 노자는 갓 태어난 아기로 보아 오히려 완전한 상태라고 말했다. 성철 스님은 성불하는 것은 부처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원래 부처였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 하였다. 어느 쪽이든 괜찮다. 고향에서는 내가 부족하여 좀 더 정진해야 할 존재로 보던, 원래의 온전한 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든지 자신의 본 모습을 찾으면 된다.

아무튼,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온 곳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추석 등 명절에 고향에 가면서 매년 돌아가는 연습을 하는 것이리라.
▲ 공부도 순서가 있다. 사술도(史術道), 도(道)로 돌아가야...
역사(歷史), 술(術), 도(道)의 줄임말인데, 공부할 때는 일단 역사를 배우고 술수(처세술, 손자병법, 경영, 경제 등)를 익히며, 다시 인간 본연의 자리(道)로 돌아가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래서 공부(독서도 마찬가지임)는 먼저 역사책을 보아야 하고, 다음에 경제, 경영, 병법, 법률, 처세술(화법, 협상, 자기 계발) 등 술수(術手)에 관한 공부를 하다가 도덕, 종교, 철학으로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급하고, 경쟁이 심한 현대 사회에서 술수 공부를 많이 하고 술수에만 머물러있다. 마음 닦는 도(道)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아니 삶이 각박하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기준과 철학이 없어, 그때그때 말과 행동이 다르니 '내로남불'이 될 수밖에 없고 '선택적'으로 기준이 바뀐다. 임기응변에는 능하나 항상 자기모순에 빠진다. 그래서는 갈수록 삶이 허망해진다.

한 움큼의 찰나 같은 권력을 잡기 위하여 화려한 언변과 뻔히 보이는 술수로 국민의 이목을 모으고 편을 가른다. 화답하듯 필자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은 그 장단에 맞추어 막춤을 춘다. 하루도 못사는 하루살이처럼, 죽을 줄 모르고 화려한 불에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말이다. 허망하고 부질없는 일이다.

다시 한 단계 올려 공부하여 정도(正道)로 돌아와야 한다. 상식으로의 노스토스, 귀환이다. 그래야 나, 가정, 사회, 국가의 앞날에 힘이 나고 밝다.
▲ 비대면 추석 시즌2와 신종추원(愼終追遠)
이번 추석 명절은 가정 내 가족 모임은 최대 8명까지만 가능할 예정이다. 코로나 비대면 추석 시즌2가 된다. 추석에는 본능처럼 천 리 먼 길 마다하고 고향을 찾아간다. 밤새 막힌 길을 가서 차례만 지내고 다시 올라오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간다. 가족들과 선물 꾸러미 양손에 들고 반가운 얼굴들을 본다.

차례를 지내고 술잔이 오가면 시누이와 올케, 삼촌들이 양념처럼 싸움판이 벌어져도 그때뿐이다. 올라올 때는 고추 말림, 콩 등을 바리바리 싸주시는 보따리를 들고 온 길을 돌아간다.

신종추원은 인간의 마지막인 특히 부모 장례를 극진히 하고 부모를 포함한 먼 조상까지 잊지 않고 추모하여 제사를 받든다는 말이다.

조상님에게 절하는 것을 두고 우상숭배까지 가는 것은 너무 나간 이야기다. 서서 기도나 묵념을 하든지, 고개 숙여 예를 갖추거나 무릎 꿇어 절을 하는 것은 '예(禮)'의 사소한 표현방식 차이일 뿐이고 집안 별로 내려온 문화와 전통, 가풍에 따르는 일이 옳다.

제사를 지내지 않더라도 가까운 사람을 잃고 추모하는 마음을 품는 것은 보통사람들의 생각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기독교 정신은 하느님에 대한 효로 시작하여 인간에게 향하는 것이고, 유교는 인간에 대한 효부터 시작하여 위로 나간다고 말씀하시었다. 제사나 차례가 조상이 아닌 조상신(우상)을 받드는 행위로 취급되는 것은 공자의 측면에서 보자면 매우 억울할 일일 수 있다.

갖은 음식을 정성 들여 차려 놓고 흡사 조상님들이 진짜 흠향( 歆饗, 제물을 받아서 그 기운을 드심)하시듯이 예(禮)를 올린다. 좋아하시던 반찬을 골고루 드시게 수저를 바꿔 놓으며, 중간에 편안히 드시도록 식구들이 뒤돌아서서 있기도 한다.

예가 마무리되면 문 앞까지 장손이나 손주가 배웅을 나간다. 필자의 집에서는 2~3명이 나가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단지, 정문까지 모셔드린다. 물론 마지막에는 두 손 모아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린다.

그리고 왁자지껄 조상님들이 드시고 남긴 음식들을 새 상에 차려서 즐겁게 먹고 마신다. 음복(飮福)이다. 가족 중 어린이와 학생들의 노래와 태권도 시범 등 즉석 발표회가 열리면서 그동안 갈고닦은 저마다의 재능들을 뽐내며 가족들 삶의 변화를 공유한다.

마지막쯤에는 산소, 제사, 혼사, 돈 등 집안 문제로 목소리가 잠시 커지다가 흐지부지 행사가 끝나간다. 주방에는 나름대로 규칙이 있어 며느리, 올케들이 손이 바쁘게 움직이며 설거지가 동시에 마무리된다. 헤어짐의 시간에는 각자 가져온 비누, 통조림 등 부담 없는 선물 세트가 오가며 다시 친정으로 시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렇다. 추석은 조상님을 핑계 삼아 가족이 만나고, 또 조상님 핑계로 차린 음식을 함께 먹으며 가족 간에 소리 높여 다투기도 하면서 묵은 앙금을 풀고 다시 새 앙금도 만들면서 가족이라는 혈연의 끈을 동여매 계속 이어 간다. 갈수록 가족들이 먼데서 살고, 바쁘게 살며, 식구가 적어져 이러한 풍속이 대를 이어가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듯하여 아쉽다.

필자는 처가가 있는 연천에 자리 잡은 선산 성묘(省墓) 담당이다. 감사한 일이다. 14년 이상 키운 페키니즈 ‘봄비’를 선산 초입에 있는 단풍나무 밑에 5년 전에 포근히 묻어주었다. 오가면서 생전 좋아한 삶은 달걀 두 개를 까서 놓아주며 나누는 대화가 묘하다.

그리고 산을 둘러보며 어려서 강제로 외우던 시를 읊조린다. 어느새 필자도 그 시인처럼 노년에 들어섰다. 믿기지 않는 세월의 말 없는 흐름이다.
▲ 타향에서 노년에 인생무상을 그린 ‘석화(石花)’
필자 촬영 /  연천군 미산면 선산, 선친께서 고향인 구 철원에 가까운 임진강 변에 터를 잡으셨다.
필자 촬영 / 연천군 미산면 선산, 선친께서 고향인 구 철원에 가까운 임진강 변에 터를 잡으셨다.
출가(出家) 石工은
천곡(川谷)을 지나
풍월(風月)을 간다.

사양(斜陽) 길
폐시(閉市)의 자리
파사(破寺)의 그늘

초행(初行)은 멀고
촌음(寸陰)은 길어
천공(天空)도 높아라!

진언(眞言)은
부상(浮上)에서
木石을 축수(祝手)하고

千古의 흐름
代 이은 여울
無言行

石花의 합장(合掌)이라!

하나도
주움도
잃음도 없이

푸른 空은 멀고
해는 붉어 뜨거운
無常의 여기

귀화(鬼火)의 넋
초로(草露)에 젖어
허장(虛葬)한 칠성판(七星板) 위

폐백(廢魄)을
더듬는다.
갈 수 없는 고향 구 철원 근처인 경기도 포천 일동에서 1972년 필자의 선친(石丁 박승민)께서 초로(初老)에 쓰신 ‘석화(石花)’라는 시다.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하셨다.

<한경닷컴 The Lifeist> 박대석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