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 & 이대리] 연예인 카톡방 스캔들, 일반인도 경계령
중견 제약회사에 다니는 박 과장(36)은 최근 단체 채팅방(단톡방) 하나를 ‘폭파’했다. 대학교 남자 동기 8명과 3년 동안 유지해온 카카오톡 채팅방이었다. 긴 시간 동안 나눴던 이야기와 추억, 그간 공유한 파일 사진 영상 등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박 과장은 동기들과 채팅방을 새로 만들며 조건을 내걸었다. 불건전한 내용이나 성적 비하 발언 등은 배제하기로 했다. 야한 동영상(야동) 또한 공유를 금지했다. 박 과장은 “빅뱅의 승리, 정준영 사건을 보며 우리끼리 아무렇지 않게 나누던 얘기들도 자칫 훗날 아찔한 결과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연예인은 아니지만 단체방에서 누구 하나가 다른 생각을 품으면 나중에 사달이 날 수도 있잖아요? 만일에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친구들도 모두 새로운 규칙에 흔쾌히 동의했어요.”

최근 연예계 단톡방에서 오간 이야기와 사진 등이 과거 범죄 행위의 증거물로 쏟아져 나오자 김과장 이대리들의 단톡방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있다. 별 생각 없이 해오던 ‘찌라시’ 공유는 그만뒀다. 해외에 서버를 둔 메신저 앱(응용프로그램)으로 단톡방을 옮기는 ‘사이버 망명’도 빈번하다. 단순 친목을 위한 단톡방부터 회사나 학교 동문회 단톡방 등 미우나 고우나 단체 채팅방에서 헤어나오기 힘든 김과장 이대리들의 이야기를 모아봤다.

사이버 망명에 ‘불시 검문’까지

스포츠웨어 제조회사에 다니는 김 과장(34·여)은 뉴스로 정준영 사건을 접한 뒤 대학교 여자 동기들과의 단톡방을 ‘텔레그램’으로 옮겼다. 텔레그램은 독일에 서버를 둔 해외 메신저 앱이다. 수사 요청이 와도 텔레그램 본사조차 열람할 수 없는 비밀 대화방 서비스가 있는 데다 시간이 지나면 대화 자체가 서버에서 삭제되는 기능도 있다. 김 과장은 “지인들이 텔레그램에 가입했다는 알림이 하루에도 수십 건씩 뜬다”며 “대단한 비밀 얘기를 나누는 건 아니지만 사적인 이야기라도 한순간에 공개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받았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로 불똥이 튀어 ‘연애 사업’에 차질이 생긴 김과장 이대리도 있다. 석유화학회사에 다니는 권 대리(33)는 최근 여자 친구에게 카카오톡 단톡방 검사를 당했다. ‘불시 검문’은 ‘비극’으로 이어졌다. 친구들과 공유한 야한 사진 등을 본 여자 친구가 이별을 통보한 것. 권 대리는 “연예인 비키니 사진 등을 들키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며 “여자 친구가 앞으로 만나지 말자고 해 싹싹 빌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권 대리의 소식을 들은 친구들도 단톡방을 나갔다. 권 대리는 “다른 친구들도 여자 친구의 불시 카카오톡 검사를 막을 명분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신기술에 밝은 정보기술(IT) 업계에서는 국내 메신저 앱 대신 외국 메신저 앱을 쓴 지 오래다. 성남 판교 IT 업체에서 일하는 최 매니저(33)는 아예 카카오톡을 스마트폰에서 삭제했다. 일할 때는 업무용 메신저 ‘슬랙’을 쓰고 친한 친구들과의 대화는 텔레그램에서 한다.

최 매니저는 “많은 지인이 사용하는 카카오톡이 없으면 생활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안 써도 별일 없더라”며 “카카오톡만 쓰셨던 부모님의 스마트폰에도 텔레그램을 깔아드렸다”고 했다.

공인도 아닌데…불안한 김과장 이대리

나오고 싶다고 해서 내 맘대로 나올 수 없는 단톡방 때문에 속앓이하는 김과장 이대리도 많다. 서울시 한 구청에서 근무하는 우 과장(39)은 “비슷한 연차 남자들만 들어있는 구청 공무원 단톡방이 있는데 다른 부서 선배가 요즘 같은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정준영 동영상 보는 법’ ‘유출 연예인 리스트’ 등을 계속 올려댄다”며 “선배 눈치가 보여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올 수도 없어 노심초사”라고 말했다.

정유회사에 다니는 유 대리(32)는 정준영 사건 이후 고등학교 동문 단톡방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유 대리는 “눈치 없이 야한 영상을 자꾸 공유하는 선배가 있는데 학교 동문 카톡방이라 함부로 나가지는 못하고 그냥 아예 없는 셈 치고 산다”고 했다. 이어 “그냥 단톡방에 포함만 돼 있어도 성폭력 공범자 또는 방관자가 되는 것 같아 찝찝하다”고 덧붙였다.

사내 기밀 보호를 위해 회사 차원에서 움직이는 곳도 있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이 상무(59)는 며칠 전에 회사로부터 최신 스마트폰을 받았다. 회사가 앞으로 6개월마다 최신 폰으로 바꿔준다고 했다. 이 상무는 “언제든 수색당할 수 있는 간부의 휴대폰에 오랜 기간 기밀 정보가 쌓이는 걸 회사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다”며 “주위 대기업 임원들은 더 빠른 주기로 전화기를 바꿔준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IT 기업에 다니는 채 대리(34)는 친구들의 전화기를 초기화해주는 가욋일을 하고 있다. 삭제한 내용까지 복구해 증거물로 활용하는 ‘디지털 포렌식’이란 단어가 뜨면서 불안해하는 친구들의 스마트폰 저장기록을 지워주고 있는 것. 초기화를 3회 이상 한 뒤 별도의 앱으로 다시 한번 청소하는 게 ‘비법’이라고 했다.

“불법 영상 등을 공유하는 건 문제지만 일반인들도 사적인 내용이 공개될까 불안해한다는 게 과연 건전한 사회 분위기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우상 기자 i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