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진료와 환자 치료를 돕기 위해 개발한 의료기기가 규제 벽에 가로막혀 활용되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없다. 그럴 때 우리는 누구를 위한 규제이고 무엇을 위한 규제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월 경기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 헬스케어혁신파크를 찾아 “의료기기산업의 낡은 관행과 제도, 불필요한 규제를 혁파하는 것이 (혁신성장 규제개혁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약속에도 규제 개혁은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다. 시민단체, 이익단체 등의 반대에 막혀 간단한 제도 개선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문 대통령이 물어봤던 규제 수혜의 주체는 시민단체와 이익단체였던 것 같다”는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다.

문 대통령은 당시 현장 방문을 통해 연구중심병원에 기술지주자회사(산병협력단)를 허용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시민단체 반대에 막혀 아직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국내 대형 대학병원의 임상 아이디어를 산업화하기 위해 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등을 연구중심병원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이들 병원조차 아이디어를 가지고 창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내 병원은 자회사를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규제를 풀기 위한 정부 방침에 시민단체들은 병원에 자회사를 세우도록 하는 것은 의료민영화라며 반발하고 있다. 의료계 관계자는 “병원들이 현장에서 나온 아이디어로 창업해 의료기관 수익성이 좋아지면 궁극적으로 건강보험 제도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줄기세포 연구 규제도 마찬가지다. 복지부는 지난해 11월 열린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 2차 규제혁파 현장대회에서 배아줄기세포 치료제 연구 범위를 선진국 수준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배아줄기세포 치료제 연구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은 지난 12일 열린 대통령 소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회의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생명윤리를 해칠 수 있다는 종교계 등의 반발 때문이다.

국내에서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할 수 있는 질환은 다발성 경화증, 헌팅턴병, 선천성 면역결핍증, 심근경색 등 20여 개뿐이다. 업계 관계자는 “영국에서는 연구 목적의 난자 기능까지 허용하지만 국내에서는 동결·미성숙 난자만 사용하는 데다 질환도 제한돼 있다”고 했다.

의료 빅데이터 활용을 위한 개인정보보호법·의료법 개정 논의도 한발짝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올해 안에 의료법에 저촉되지 않는 헬스케어 분야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계획이었지만 내년으로 미뤄졌다. 원격의료 허용에 반대하는 의사들의 집단 이기주의에 밀렸기 때문이다. 약사들의 반대에 막혀 편의점에서 파는 상비약도 늘리지 못하고 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