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강생 적은 과목, 내신 힘들어 꺼려"…상대평가 의식 '눈치작전'
김상곤-학부모·교사 간담회…과목선택 불이익·교사충원 대책 우려 쏟아져
'준 고교학점제' 학교 가보니… 자연계학생이 경제수업 골라 수강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영역 지문에 '오버슈팅'이라는 낯선 단어가 등장했다.

외환시장에 충격이 가해지면 단기적으로는 환율이 급등락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장기적으로는 균형수준으로 돌아가는 현상을 말하는 경제용어다.

경제학 배경지식이 있으면 국어시험 풀기가 수월했던 셈이다.

그러자 학교에서 경제수업을 듣지 못한 자연계 수험생은 국어시험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했다며 볼멘소리가 나왔다.

27일 서울 강서구 한서고등학교에서 만난 이 학교 2학년 고영석군은 자연계지만 경제수업을 선택해 듣는다.

한서고가 '준 고교학점제' 또는 '초기단계 고교학점제'로 불리는 '개방-선택형 교육과정'을 운영하기 때문이다.

'경제를 예측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공학자가 꿈인 고군은 암기위주여서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지구과학 대신 어려서부터 관심 있었던 경제수업을 듣는 것이 꿈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군이 올해 수능을 봤다면 국어시험에서 오버슈팅이라는 단어를 접해도 다른 학생보다 덜 낯설게 느꼈을지 모른다.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이날 선도모델로 꼽히는 한서고에서 2022년 고교학점제 도입계획을 발표했다.

고교학점제는 고등학생도 대학생처럼 원하는 수업을 골라 듣고 기준학점을 채우면 졸업을 인정해주는 게 핵심 내용이다.
'준 고교학점제' 학교 가보니… 자연계학생이 경제수업 골라 수강
오후 2시 10분 5교시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1층 교과목실에 한국지리 교과서와 참고서, 필통을 든 학생 3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2학년 1반부터 7반까지 학생 중 한국지리를 듣고 싶다고 선택한 학생들이다.

매주 월·화·목·금 2교시와 5교시는 학생들이 자신이 선택한 수업을 찾아서 듣는 시간이다.

이날은 김 부총리 방문에 맞춰 오후 2시 20분부터 시작하는 6교시에 학생선택 수업이 진행됐다.

2학년생들은 사회·과학탐구영역 선택과목과 교육학, 철학, 정보기술 수업을 골라 들을 수 있다.

3학년이 되면 간호학이나 아동교육학,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 대학입시와 거리가 먼 과목도 선택할 수 있다.

이날 한국지리 수업은 조별로 2박 3일간 북한여행 계획을 짜는 내용이었다.

김 부총리와 취재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소 수업처럼 진행됐다.

4반 손미주 학생은 "유치원 선생님이 꿈이라 다양한 분야 지식을 쌓고 싶은 생각에 한국지리 수업을 택했다"고 밝혔다.

손양은 자신의 꿈에 맞춰 윤리선생님이 진행하는 교육학 수업도 선택해 듣고 있다.

물론 손양이 '꿈'과 '흥미'만을 고려해 수업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손양은 '비밀'이라면서 "내가 듣고 싶은 수업이더라도 그 수업을 듣는 학생이 너무 적으면 내신성적을 잘 받기 어려워 신청하기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내신 상대평가가 유지되는 한 고교학점제가 자칫 '눈치작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반 학생들은 체육수업을 마친 후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한국지리 수업에 오느라 다른 학생들보다 늦게 들어왔다.

수업에 지각하지 않고자 급히 뛰어와 붉게 상기된 학생들 얼굴은 학점제를 졸속으로 도입하면 기존 학교운영 방식과의 충돌로 혼란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지적을 떠올리게 했다.

김 부총리와 학생·학부모·교사 간담회에서도 여러 우려가 쏟아졌다.

학부모들은 상대평가 상황에서 학생 수가 적은 과목을 선택해 들은 학생들이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지, 다양한 수업을 개설하려면 해당 분야를 전공한 교사가 여럿 필요한데 학령인구 감소 상황에서 교사를 늘릴 수 있는지 등에 관한 질문이 이어졌다.

김 부총리는 "대입에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면서 "고교학점제가 시행되면 교사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점차 확충해나가겠다"며 원론적인 답변을 내놨다.

고교학점제가 고교내신 절대평가(성취평가제) 도입을 전제로 추진되느냐는 질문에는 "전제는 아니다"라면서 "연구·선도학교를 위주로 몇 년간 학점제를 시행하면서 고교교육 정상화를 위해 성취평가제라든가 수능·대입제도 변화 등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종합적으로 고려해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