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사태] 첫 환자 '메르스 의심' 신고 묵살…감염병(病) 매뉴얼 없어 '땜질 대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확산으로 국내 방역 시스템에 ‘구멍’이 뚫린 것이 확인됐다는 지적이 많다. 신종 감염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없었고, 경보 단계 격상에 따른 실무지침도 제시돼 있지 않았다. 담당 직원들은 자신의 역할을 모르고 우왕좌왕했고, 관련 정보가 부족한 탓에 접촉자 범위도 지나치게 좁게 잡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초기에 방심한 정부

[메르스 사태] 첫 환자 '메르스 의심' 신고 묵살…감염병(病) 매뉴얼 없어 '땜질 대처'
첫 환자 A씨를 진료한 의사는 바레인을 다녀왔다는 A씨의 얘기를 듣고 보건당국에 메르스 의심환자로 신고했다. 하지만 질병관리본부는 검사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내 메르스 위험국 명단에 바레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보건당국은 메르스 국내 유입 가능성을 크게 보지 않았다. 지난해 질병관리본부의 내부 인식조사 결과 발생 가능성이 큰 신종 감염병으로 메르스를 꼽은 경우는 직원 299명 중 7명(2%)에 그쳤다. 2013년부터 “중동을 다녀온 원인 불명 폐렴환자는 메르스로 생각하라”는 민간 전문가들의 제언도 나왔지만 정책에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의료진 대상 교육도 거의 없었다. A씨를 진료한 한 병원 의사는 “메르스라는 병 자체를 몰랐다”고 고백했다. 이 의사는 나중에 메르스에 감염돼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어진 대응은 ‘뒷북’

첫 환자가 확인된 후에도 보건당국은 “사람 간 감염이 어렵고, 지역 사회 전파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잠정적 가이드라인만 믿고 대응했다. 한국적 상황에서 바이러스의 생존력이나 전파력이 강해질 수 있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았다.

병원 내 감염도 우려됐지만 정부는 “해당 의료기관을 방문해도 감염 가능성이 없다”고만 했다. 첫 환자와 밀접하게 접촉한 사람의 격리 요구도 무시했다. 첫 환자와 같은 병실을 쓰지 않은 사람이 확진된 날에도 “2m 이내에서 1시간 이상 접촉한 사람만 감염된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그러나 며칠 후 해당 병원 7~8층 전체가 바이러스에 상당 부분 노출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확진환자가 병실 밖 로비를 걸어다닌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거나, 병원 입원 기간을 잘못 계산한 게 드러났다.

3차 감염을 우려한 민간전문가 집단(즉각대응팀)에서는 메르스 발생 병원명의 빠른 공개를 요구했지만 보건복지부는 묵살했다. 지난 5일에서야 첫 환자가 입원했던 병원명(평택성모병원)을 공개했다. 메르스대응팀에 소속돼 있는 한 전문가는 “병원명 공개는 민감한 문제인데도 의사결정에 도움이 될 만한 기초자료나 가이드라인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현재 정부의 매뉴얼에는 환자가 발생했을 때 병원 운영을 계속해야 하는지, 남아 있는 환자는 어떻게 조치해야 하는지, 해당 병원 이름은 공개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다.

◆경보 매뉴얼 있으나 마나

보건당국은 메르스 경보를 ‘주의’ 단계로 격상했다. 하지만 이에 따른 구체적인 인력 운용 등 실무지침은 제대로 제시돼 있지 않았다. ‘경계’ 단계로 올리더라도 마찬가지다. ‘주의’ 단계에서는 중앙방역대책본부를 ‘설치 운영’하고 ‘경계’ 단계에선 ‘운영을 강화한다’고만 돼 있다.

컨트롤타워에도 혼선이 생겼다. 복지부 소관 중앙메르스관리대책본부와 국민안전처 소관인 범정부 메르스대책지원본부의 업무 분장이 분명치 않았다. 휴교 조치에 대해 교육부와 복지부 간 의견이 달라도 조율할 곳이 없었다. 그 사이 중앙대책본부의 수장은 질병관리본부장(1급)에서 복지부 차관, 또 장관으로 며칠마다 바뀌었다.

지방자치단체와의 엇박자는 예견된 일이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복지부가 정보 공유를 하지 않아 독자적으로 행동하겠다”며 지난 4일 한밤중 긴급 기자회견을 했다. 강원도와 인천시 등은 한때 메르스 환자 치료를 위한 음압 병상을 내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감염병 유행 시 지자체와 공조해야 한다는 감염병관리법 내용이 무색해졌다. 이종구 메르스 합동평가단장은 “전파 범위에 대한 (정부의) 초기 예측이 잘못돼 지자체 자원을 제때 동원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