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사 vs 제조사 '30년 전쟁'…힘의 균형이 기울고 있다 [박동휘의 컨슈머리포트]
가격 결정의 메커니즘은 전쟁을 닮았다. 유통과 제조가 가격 결정권이란 깃발을 거머쥐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고지전이다. ‘보이지 않는 손’ ‘수요와 공급의 균형점’ 같은 경제학 용어들은 10원이라도 싸게 물건을 공급하기 위해 유통업계에서 펼쳐지는 ‘10원 전쟁’ 속 다양한 공방 양상을 온전히 담지 못한다.

유통사 vs 제조사 '30년 전쟁'…힘의 균형이 기울고 있다 [박동휘의 컨슈머리포트]
이론상 유통의 본질은 90원 가치의 상품을 공급받아 10원의 ‘마진(이익)’을 얹어 100원에 파는 것이다. 가격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유통사들의 경쟁력은 두 가지다. 박리다매 전략을 취하거나 제조사를 압박해 상품을 더 싸게 공급받는 것. 때론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출혈 경쟁도 감수한다. 이 싸움에서의 승자가 유통 시장을 장악한다.
컬리의 ‘신라면 최저가 공급’

소비재를 생산하는 제조사의 지향점은 하나의 제품에 하나의 가격을 책정하는 일물일가(一物一價)다. 대형마트, 슈퍼마켓, 편의점, e커머스 등 판매처가 어디든 상관없이 신라면의 가격을 정하는 건 농심이어야 한다. 유통과 제조의 전쟁에서 누가 승리할지, 누가 이겨야 인류 삶에 더 기여할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1962년 샘 월튼이 창업한 월마트는 1970년대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침체 위기의 미국 경제를 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픽=김선우 기자
그래픽=김선우 기자
하지만 유통의 득세는 때로 혁신의 벽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아마존과 쿠팡이 평정한 세상에서 제조사들은 유통사가 기획한 자체 브랜드(PB)를 생산하는 단순 하청으로 전락할 수 있다. 1993년 이마트의 등장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 ‘제통(製通·제조사와 유통사)’ 전쟁의 현재는 어떠한가.

유통사 vs 제조사 '30년 전쟁'…힘의 균형이 기울고 있다 [박동휘의 컨슈머리포트]
출근길에 아파트 엘리베이터 광고를 멍하니 지켜보다 눈이 크게 떠졌다. 농심 ‘신라면’을 싸게 판다는 마켓컬리의 광고였다. 유통산업을 담당하는 기자로서 두 가지 생각이 스쳤다. 우선, 컬리의 영역 확대가 인상적이었다. ‘맛있는 아보카도’에서 시작한 컬리가 이젠 ‘식탁 위 모든 상품’으로 보폭을 넓히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생각은 ‘컬리는 과연 신라면을 얼마에 공급받았을까’였다. 일단 마켓컬리 앱을 열고 신라면을 검색했다. 그중 ‘신라면 5개입’ 상품이 눈에 띄었다. 왼쪽 하단엔 소박하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최저가 도전’. 얼마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표현인가. ‘최저가가 아닌 줄은 알지만, 최대한 최저가에 근접한 수준이라는 것을 컬리를 사랑하는 이들이 알아듣고 넘어가 달라’는 간곡 화법이 짧은 두 단어에 담겨 있는 듯했다.

한국 제통 전쟁의 역사에서 신라면은 상징적 존재다. 수십 년간 국내 라면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신라면을 얼마에 팔 수 있느냐가 유통회사의 경쟁력을 상징했다. 동서식품의 ‘맥심’ 커피믹스, 동원F&B의 참치캔, CJ제일제당의 ‘햇반’ 등 오랜 충성 고객을 확보한 몇몇 내셔널브랜드(NB)만이 신라면과 비슷한 지위를 갖고 있다.

컬리의 광고는 e커머스가 국내 제통 전쟁에서 승기를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컬리 관계자는 “손해를 보지 않고 팔 수 있는 수준에서 신라면을 공급받고 있다”고 말했다.

e커머스발(發) 신(新)제통 전쟁의 포문을 연 곳은 쿠팡이다. 쿠팡은 ‘곧 망할 기업’이란 비아냥 속에서도 지난해 3월 한국 기업 최초로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에 성공했다. 규모의 경제를 무기로 쿠팡은 끊임없이 식음료 제조사에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다. ‘다이내믹 프라이싱’이라는 가격 전략은 보이지 않는 으름장이다. ‘어떤 제품이든 다른 유통 채널에서 파는 가격보다 싸게 판다’는 원칙이다.

논리 구조는 간단하다. 창고 보관, 배송 등 물류를 비롯해 마케팅, 영업 등 판매 관리까지 쿠팡이 해결해주니 그만큼의 값을 공급가 산정 시 감안해달라는 것이다. 예컨대 농심은 전국 100여 곳에 달하는 쿠팡의 물류시설에 신라면을 가져다 놓기만 하면 된다. 최종 소비자의 문 앞에 도달하기까지 복잡다단한 과정은 모두 쿠팡이 도맡는다. 그러니 이마트나 CU에 납품하는 것보다 공급가가 낮아야 한다는 게 쿠팡의 셈법이다.
‘유통 대세’로 자리잡은 e커머스

적어도 작년 말까지는 대형 식음료 제조사들에 쿠팡을 비롯한 온라인 유통은 ‘듣보잡’에 가까웠다. 쿠팡도 신라면 등 대표적인 NB 제품을 이마트보다 싸게 팔려면 적자를 감수해야 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쿠팡은 빠른 배송과 전 품목 최저가를 핵심 경쟁력으로 고수하고 있다”며 “힘의 우위에서 대형 제조사들에 밀린 것이 작년까지 수천억원대 영업적자를 낸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LG생활건강과는 전면전을 불사했다. LG생활건강은 “정해진 가격대로 대리점을 통해 물건을 받아가라”고 배수진을 쳤다. 급기야 공정거래위원회까지 개입해 누가 공정거래 원칙을 어겼는지를 놓고 양사는 감정싸움을 거듭했다. 현재까지 LG생활건강의 화장품과 샴푸 등 유명 상품은 쿠팡에서 구하기 힘들다.

하지만 불과 몇 개월 만에 판세가 바뀌었다. LG생활건강만 해도 쿠팡에 물건을 공급하고 싶어 안달이다. LG생활건강 관계자는 “대형 제조사조차 가격 협상을 하면서 쿠팡에 쫓겨나는 굴욕을 당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쿠팡은 작년 말 무렵부터 주요 식음료 제조사와의 전쟁을 종식한 것으로 알려졌다. 식음료업계 관계자는 “농심이 신라면을 비롯해 생수 브랜드 ‘백산수’ 공급가를 대형마트보다 싸거나 비슷하게 쿠팡에 공급하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쿠팡 측은 이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고 있지만, 에둘러 이렇게 표현했다. “식음료 제조사들과는 상생의 길을 걷고 있다.”

농심의 납품처 비중만 봐도 변화된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대형마트, 체인형 슈퍼마켓(SSM), 편의점 등 대형 오프라인 유통업체 비중은 여전히 48.1%로 가장 크다. 이런 가운데 2019년 ‘제로’에 가까웠던 e커머스 비중이 지난해 8.3%로 커지더니 올 1분기엔 9.6%로 불어났다.

믹스 커피의 절대 강자 동서식품도 쿠팡에 대해선 ‘특별 관리’에 나설 정도다. 쿠팡 납품을 전담하는 조직을 모회사인 동서에 별도로 마련했다.

동서식품은 대형마트, 편의점, 농협하나로마트, SSM에는 직접 상품을 공급하고 쿠팡을 제외한 e커머스를 비롯해 동네 슈퍼, 식자재마트 등에는 판매 계약을 맺은 대리점 또는 특판점을 통해 납품한다. 동서식품 관계자는 “제조사의 원칙은 유통 채널별로 가격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며 “쿠팡 전용 상품을 만들 경우 가격 충돌을 최소화해야 하는데 이를 대리점 조직이 맡기엔 납품 규모가 너무 크다”고 했다.

묶음 등 대용량 판매 시 낱개로 쪼개 팔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납품 가를 낮추고 있다는 얘기다. 유통업체 관계자는 “이마트 등 대형마트 전성기인 2000년대, 편의점이 전국에 3만 개를 돌파한 2010년대에 식음료 제조사들이 구사했던 협상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신유통의 존재를 인정하되, 구유통과의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가격 결정권, 누가 갖느냐의 싸움

제통 전쟁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품 시장은 공급자가 지배했다. 공장, 설비, 노동 등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는 그들끼리의 경쟁을 통해 가격을 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이런 구조를 바꿔놨다. 물자를 효율적으로 나르기 위한 물류 혁명이 이뤄졌다. 글로벌 공급망을 움직이는 컨테이너가 세상에 나온 건 1955년 맬컴 매클레인에 의해서였다. ‘규격화한 대형 컨테이너에 물건을 실어 전 세계 바다를 누빈다는 발상’은 물자의 이동 속도와 편의를 엄청나게 증진시켰다.

유통업이 발달하려면 사방팔방 자동차가 달릴 도로가 필요하다.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후진국에 이마트와 쿠팡 같은 대형 유통업체가 등장하기 어려운 이유다.

국내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농심, 동서식품, 동원F&B, CJ제일제당, 오리온, 유한킴벌리, 롯데칠성, LG생활건강, 아모레퍼시픽 등 쟁쟁한 식음료 기업(생활용품, 화장품 포함)들은 이마트 같은 대형 유통업체가 출현하기 전까지만 해도 오랫동안 지배자로 군림해 왔다. 그들은 상품을 제조하고, 유통도 직접 통제했다. 대리점 혹은 특판점이라고 불리는 전국 유통망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동네 작은 슈퍼부터 편의점, 농협 하나로유통에까지 물건을 공급했다.

대형 식음료 제조사들의 전국 대리점은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퇴직 임원들이 제2의 삶을 살기 위한 거점이 대리점이었다. ‘정관장’이라는 브랜드를 운영하는 한국인삼공사가 대표적이다. 정관장에서 판매하는 홍삼 등 각종 인삼 제품은 쿠팡, 컬리 등 e커머스의 강자들이 접근조차 못 하는 난공불락이다. 야쿠르트 아줌마 조직을 갖추고 있는 hy도 비슷한 사례다.

제조사의 대리점망은 요즘의 택배업과 비슷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취업이 쉬웠던 만큼 갈 곳 없는 청춘들이 이곳에서 직업을 찾았다. 1t짜리 작은 미니 트럭에 한가득 과자며 음료 등을 싣고 자신의 영업망을 돌면서 동네 슈퍼 사장들에게 물건을 팔았다.

유통을 통제하고 싶은 제조사의 욕구는 한결같다. 가전 제조사들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여전히 각자 유통 매장을 운영한다. 롯데하이마트, 전자랜드 등 가전 양판점이 등장했지만 가전 시장에서 제조사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삼성, LG전자의 의도는 명확하다. 가격 결정권을 쥐겠다는 것이다. 삼성, LG전자 입장에서 국내 판매 가격이 무너지면 이는 전 세계 수출 가격에 직격탄이 된다.

에르메스, 샤넬, 루이뷔통 같은 해외 명품 브랜드도 똑같은 전략을 구사한다. 전 세계 백화점에 직영 매장을 내고, 영업 직원도 직접 뽑는다. 백화점은 이들 브랜드와의 관계에서 유통사라기보다는 매장 임대인에 가깝다.

대형 식음료 업체들이 대리점망을 고수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커피시장에서 40%의 점유율로 동서식품을 맹추격했던 네슬레가 2000년대 이후 힘을 잃고 점점 점유율이 떨어지게 된 이유는 기존 대리점 조직을 포기하고 대형마트 직판으로 돌아서면서 영업 조직이 붕괴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물류 혁명이 낳은 유통업의 발전

아마존에서 시작된 정보기술(IT)을 접목한 2차 물류 혁명은 수십 년간 진행된 제통 전쟁의 균형추를 유통 쪽으로 옮겨 놓고 있다. 아마존과 쿠팡은 최첨단 창고관리시스템(WMS)을 개발함으로써 유통판 ‘저스트 인 타임(just in time)’을 실현하고 있다. 그들은 대형이건 소형이건 모든 제조사를 PB 공급자로 만들기를 원한다. 인공지능(AI)을 통한 빅데이터 분석 기술로 상품 수요를 예측할 수만 있다면, 제조사들은 주문에 맞춰 그때그때 상품을 찍어내기만 하면 된다. 재고 걱정도, 소비를 창출하기 위한 마케팅도 필요없다. 이 모든 번잡한 일들은 아마존과 쿠팡이 해줄 것이다.

국내 오프라인 유통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GS25를 운영하는 GS리테일의 ‘메이플빵’이 그런 사례다. 상품 기획부터 판매 전략까지 전 과정을 GS리테일이 맡고, 롯데제과는 제조만 담당했다. 편의점업계 관계자는 “소비자 접점을 잃은 식음료 제조사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을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유통의 우위는 글로벌 현상이다. 지난해 월마트와 아마존 매출은 각각 5727억달러(약 744조원), 4698억달러(610조원)에 달했다. 세계 1위 식품, 음료사인 네슬레와 AB인베브의 작년 매출은 각각 944억달러(약 122조원), 544억달러(약 70조원)다.

국내 제조와 유통은 그나마 힘의 균형을 아직 유지하는 축에 속한다. 적어도 규모 면에선 지난해 연결 기준으로 CJ제일제당의 매출은 26조원으로, 이마트(25조원) 쿠팡(22조원) 롯데쇼핑(16조원)을 앞서고 있다. 유통업체 간 경쟁이 미국에 비해 훨씬 치열하다는 점도 제조업체에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쿠팡의 치열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티몬, 위메프 같은 군소 e커머스 업체들은 여전히 자신만의 영역을 유지하고 있다.

이마트는 최근 40개 품목에 한해 쿠팡과 비교해 무조건 싸게 파는 ‘10원 전쟁’을 선포했다. 대형 식음료 제조사와의 오랜 공생 관계를 십분 활용해 e커머스 신흥 강자들을 억제하려는 포석이다.

유통사 vs 제조사 '30년 전쟁'…힘의 균형이 기울고 있다 [박동휘의 컨슈머리포트]
그럼에도 형세는 식음료 제조사에 불리하다. 월마트는 196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글로벌 인플레이션 시대에 ‘월마트 물가’를 내세우며 인플레이션 파이터 마케팅과 함께 급성장했다.

제조사가 살길은 결국 혁신뿐이다. 국내 식품 1위사인 CJ제일제당의 매출 대비 연구개발(R&D) 비중은 1.1%(올 1분기)에 불과한 실정이다. 2위 밑으로는 1% 미만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끊임없는 변신으로 매년 새로운 가전 수요를 창출하면서 여전히 가격 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유통은 가격에, 제조는 가치에 집중하는 것이 각자가 지켜야 할 업(業)의 본질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박동휘 유통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