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호 논설위원
[장규호의 논점과 관점] 되살아난 일본化의 공포

지난 주 세계 경제에 큰 뉴스 두 가지가 전해졌다. 7년8개월간 일본 경제 회생에 전력해온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달 28일 전격 사임을 발표했다. 같은 날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은 각국 중앙은행장 연례회의인 잭슨홀미팅에서 ‘앞으로 2% 이상의 인플레이션을 용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 아베노믹스(아베 총리의 경기부양책)가 역사 속으로 퇴장하고, 중앙은행 역할의 전환을 알리는 ‘평균물가목표제’가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물가 상승을 일정 수준 이하로 관리하는 ‘인플레 파이터’로서 중앙은행의 임무가 중요했다면, 앞으로는 고용과 성장을 위해 어느 정도의 물가상승은 감수하겠다는 게 평균물가목표제의 함의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1%에도 못 미치는 선진국 물가상승률이 경제에 더 위험하다는 공식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물가상승 기대가 중요하다
여기에선 가계·기업에 ‘물가가 2% 이상 상승할 것(경기가 회복될 것)’이란 기대를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 수년간의 양적 완화, 대규모 자산매입 등 초강력 금융완화정책이 고용과 성장 견인책으로 먹혀들지 않은 것은 경제주체들의 낮은 기대인플레이션율 때문이라는 진단에서다. 한국만 해도 2008년 4%대 후반까지 올라갔던 기대인플레이션율이 1%대 후반으로 내려앉은 지 오래다.

평균물가목표제 도입으로 저금리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란 관측에 각국 주식 투자자들은 반색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의 비(非)전통적 금융완화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해온 전문가들은 적지 않은 우려를 나타낸다. 평균물가목표제도 완화적 금융정책의 새 버전이란 점에서 돈을 푸는 만큼 물가가 오르고, 경기가 살아나고, 임금도 늘고, 성장세도 회복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 넘게 침체된 유럽 경제가 바로 그런 경우다. 엄청난 규모의 양적 완화로 금융위기 직후 유럽의 기업 대출금리는 반 토막도 더 났다. 풍부해진 ‘돈다발’은 유럽에 한계기업들을 양산했고, 빚으로 연명하는 이들 기업의 존재는 설비투자와 생산성을 높이는 데 걸림돌이 됐다. 이 때문에 시장의 좀 더 효율적인 부문으로 돈은 흘러들지 못했다. 당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였던 마리오 드라기도 작년 “금융완화정책이 고용과 국내총생산에 긍정적 영향을 줬지만, 노동자 임금과 물가상승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금융위기 후 유럽서 교훈 찾아야
그나마 미국은 불량자산구제프로그램(TARP) 같은 기구를 설립해 금융부문의 자본 보강을 병행하면서 통화완화정책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었다. 2010년 초반 미국의 물가상승률은 2%를 회복했다. 유럽 각국은 그러지 못했고, 미약한 내수에 따른 저성장과 장기불황을 특징으로 하는 ‘일본화(japanization)’의 늪에 빠져들게 됐다.

한국 금융계도 이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때다. 중소기업 등의 대출만기를 한 차례 연장한 데 이어 다시 6개월 연장을 추진하지만, 부실을 유예한 것에 불과하다. 코로나 위기 이후 29조원 규모의 원화 유동성을 공급하고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기구까지 만드는 등 한국은행의 노력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국제적 논의 흐름을 이끄는 평균물가목표제에 혹시라도 과도한 관심을 갖지 않을지 걱정을 지울 수 없다. 아베노믹스의 종료에도 불구하고 어슬렁거리는 일본화의 그림자가 우리 곁에서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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