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67년 만의 귀가
“잘 다녀오겠소.” 김진구 하사가 입대한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6월이었다. 그의 나이 24세, 신혼 3년차였다.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는 아내와 18개월 된 아들을 두고 전쟁터로 향하는 마음은 돌덩이 같았다. 제2사단에 배치돼 전장을 누비던 그는 이듬해 7월 철원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 불과 2주 전이었다.

그가 산화한 화살머리고지는 화살촉처럼 생긴 고지로, 인접한 백마고지와 함께 중부전선 방어에 없어서는 안 될 전략요충지였다. 이곳을 빼앗기면 ‘철의 삼각지대’인 평강·철원·김화 지역 보급로가 끊긴다. 그 때문에 치열한 전투가 네 차례나 벌어졌다.

그의 유해 발굴 소식은 67년이 지나서야 전해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진지를 사수하다 적의 포탄에 산화한 듯, 그의 유해는 골절된 상태로 발굴됐다. 그 사이에 갓난 아들은 70세가 됐고, ‘젊은 새댁’은 90세가 됐다. 열아홉에 결혼해 3년 만에 남편을 잃고 애끓는 세월을 견뎌온 아내 이분애 씨는 전사한 지 67년 만에 돌아온 유해를 안고 오열했다.

이씨가 남편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제주에서 두 달간 군사훈련을 받고 부산항에 잠시 내렸을 때였다. 당시 아장아장 걷는 아들이 아버지 얼굴을 어떻게 알아봤는지 낯도 안 가리고 품에 안기는 걸 보고 마음이 아렸다. 그렇게 떠난 남편은 전쟁터에서 아들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아들 사진 찍어서 보내달라고 해서 찍어 보냈어. 조그만 거, 그거 받아 보고는 ‘받아 봤다’ 이렇게 말하고선….”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이씨의 등 뒤로 지난 시절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그는 하루 12시간씩 방직공장에서 일하며 외아들을 키우는 동안 남편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간직한 사진 속 남편은 눈썹이 짙고 콧날이 선명한 미남이다. 그는 “친정 가는 길에 나를 업어준 남편의 다정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신혼시절을 회상했다. 아들은 “유해를 수습하지 못해 무덤을 만들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던 어머니가 이제 아버지와 함께 묻힐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김진구 하사의 유해는 오는 19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그의 유품인 군용 숟가락에는 철필로 긁은 이름이 새겨져 있다. 녹슨 탄피와 함께 발굴된 숟가락 모양이 화살촉과 닮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