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정주영이 꿈꾼 '새 봄'
“저 사람은 누굽니까?” 윗목에 앉아 문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남자를 보며 구상 시인이 물었다. 집 주인인 모윤숙 시인이 대답했다. “저 아래에서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는 정주영이란 분이에요. 문인들께 문학과 인생을 배우고 싶다더군요. 그래서 오라고 했지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젊은 시절 모윤숙 씨의 집에서 시인 서정주 김광섭, 수필가 조경희 씨 등 많은 문인을 만났다. 실향민인 네 살 아래 구상 시인과는 특별히 친했다. 구상 시인으로부터 “천생 시심(詩心)을 가진 만년 문학청년”이라는 평도 들었다.

정 회장은 초등학교밖에 못 나왔지만 어릴 때부터 신문에 연재된 이광수 소설 ‘흙’을 읽으며 꼭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좋은 시를 보면 줄줄이 암송했다. 중년 이후에도 강릉 경포대의 ‘해변 시인학교’에 해마다 참가하며 “사업 때문에 꿈을 접었지만, 문인들을 보면 늘 부럽고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문학적 감수성과 글 솜씨도 뛰어났다. 그의 산문 ‘새 봄을 기다리며’는 1981년 2월 25일 서울신문에 실렸다. ‘창밖으로 내리는 부드러운 함박눈은 오는 봄을 시샘하는 것인가?’로 시작하는 이 글에서 그는 ‘눈을 밟으며 뛰어가는 운동화 바닥’과 ‘경복궁 돌담장 옆 새벽 공기’에서 봄을 느끼다가도 ‘사무실에 들어서면 봄은 간곳없이 사라진다’고 썼다.

날마다 실적에 쫓기며 ‘남이 잘 때 깨고 남이 쉴 때 뛰어야 하는’ 기업인들이 ‘하늘의 별을 딸 듯한 기세로 달려가지만 정치가나 공직자 또는 성직자들의 비판 앞에서는 자라목같이 움츠러들기를 잘한다’며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기업인들이 봄을 기다리는 건 하늘에 별을 붙이고 돌아오는 여인을 기다리는 바나 다름없이 공소(空疎)한 경우가 많다’고도 했다.

그러나 글의 말미에는 ‘봄눈이 녹은 들길과 산길을 정다운 사람들과 함께 걸으면서 위대한 자연을 재음미하고 인정의 모닥불을 피우리라’며 새로운 봄의 꿈을 담아냈다. 그런 희망의 메시지가 마지막 문장에 잘 응축돼 있다. ‘봄이 온다. 마음 깊이 기다려지는 봄이 아주 가까이까지 왔다.’

권오갑 현대중공업 회장이 그제 이 구절을 인용하며 임직원들에게 “코로나 위기를 정주영 정신으로 극복하자”고 강조했다. 내일은 정 회장의 19번째 기일(忌日)이다. 그가 살아 있다면 올해 봄은 과연 어떻게 느낄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