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그땐 옳았고, 지금은 틀리다
신나게 말을 달리던 한 인디언이 갑자기 멈춰섰다. 말이 지친 것도, 목적지를 지나친 것도 아니었다. 무슨 일이냐고 동행이 물었다. 인디언이 숨을 고르며 답했다. “내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할까봐….”

한국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압축성장 국가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것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것도 불과 100년 안쪽이다. 같은 스타트라인에 섰던, 아니 오히려 조금 앞서 달렸던 북한과 비교하면 그 속도의 놀라움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북한의 작년 국민총소득(GNI)은 36조6310억원(통계청 발표 기준)으로 한국(1730조4600억원)의 47분의 1에 불과하다. 무역 규모는 격차가 더 크다. 한국(1조522억달러)이 북한(55억5000만달러)을 190배가량 웃돈다.

인디언의 ‘혜안’은 한국에도 적용된다. 너무 빠른 성장은 곳곳에서 ‘의식의 지체 현상’을 빚고 있다. ‘영혼’이 못 따라오고 있는 것이다.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시각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출범 이후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과 주 52시간 근로제 등 ‘친노(親勞)’ 성향의 정책을 쏟아냈다. 재계와 학계 등으로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꿈쩍도 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착취당하는 노동자’와 ‘그들의 고혈을 빠는 경영자’라는 오래된 이분법은 의외로 견고했다. 결과는 ‘선의(善意)’와 반대로 가고 있다. 연봉 1억원에 가까운 대기업 노조원들은 반색한다. 반면 중소기업 근로자와 영세 자영업자, 아르바이트생은 멀쩡한 일자리를 잃거나 수입이 줄고 있다. 물론 아직도 종업원의 기본 인권을 무시하는 경영자가 존재한다. 하지만 예전보다 확연히 줄어든 것 또한 사실이다. 산업 구조와 규모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전태열 열사’ 시절의 노동환경을 상정한 정책은 그렇게 왜곡의 길을 가고 있다.

집중투표제 도입과 감사위원 분리 선임 등의 내용을 담은 상법개정안도 같은 인식에서 출발한다. 공정거래위원회 역시 ‘기업·기업인=탐욕 덩어리’라는 인식 근처에서 맴도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엔 국민연금까지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책임 원칙)’라는 신무기를 앞세워 ‘기업 군기잡기’ 행렬에 동참하는 분위기다.

이르면 이달 말 발표될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 개정안도 마찬가지다. 근로자의 안전을 위한다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다. 다만 시대가 바뀌었고 산업은 극도로 다양해졌다. 건설 현장과 반도체 공장을 일률적으로 규제하긴 어렵다. 모든 산업재해의 책임을 원청업체가 떠안으라는 것도 현실성이 없다. 협력업체의 작업은 사업장 곳곳에서 이뤄진다. 원청업체가 모두 관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유해물질을 다루는 작업은 전문 하청업체가 더 능숙하다.

정권 출범 초기부터 줄곧 논란을 빚고 있는 ‘탈원전 정책’에도 ‘과거의 유령’이 어른거린다. 원전 기술은 꾸준히 발전했지만 정책 입안자들의 사고는 여전히 30여 년 전 ‘체르노빌’ 시대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인류는 과다 출혈을 막기 위해 혈액이 빨리 굳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의료 기술 발달로 출혈에 의한 사망 확률은 크게 낮아졌다. 그런데도 혈액응고 시스템은 여전히 강력하다. 뇌졸중 등 혈전으로 인한 사망자가 과다 출혈로 인한 사망자보다 훨씬 많아지게 된 이유다. 생존을 위한 선택은 시간이 지나 오히려 질병의 씨앗이 됐다.

과거의 잣대로 미래를 재단하면 예기치 않은 오류가 생긴다.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리는 지혜도 필요하다. 그땐 옳았지만 지금은 틀린 경우, 너무 많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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