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우리 사이, 좋은 사이
시무식에서 어떤 얘기를 할까 고민하다가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이야기’를 했다. 지난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해 우리 식구가 세 배가 됐기에 꼭 필요할 것 같았다. 내용은 이렇다. 추운 날 고슴도치들이 덜덜 떨다가 친구의 체온이 그리워 서로 다가간다. 몸이 맞닿는 순간 고슴도치들은 기겁하고 떨어진다. 서로의 몸에 난 가시 때문이다. 고슴도치들은 몇 차례 반복해가며 서로 찔리지 않는 가장 가까운 ‘사이’를 찾아낼 수밖에 없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고슴도치의 딜레마(Hedgehog’s Dilemma)’라고 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혼자서는 살 수 없다. 혼자 살기에는 너무도 춥고 삭막하다. 그래서 서로에게 다가가지만 영락없이 고슴도치 신세가 돼 피를 흘리며 떨어져 서로를 원망하기 쉽다. 우리 누구에게나 가시가 있다. 자기를 방어하는 가시가 입, 눈짓, 또는 손과 발이 돼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인간(人間)이라고 부른다. 사람들 사이에서 적당한 온기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가진다. ‘사이(間)’가 문제다. ‘사이’가 중요하고 좋아야 할 텐데 그렇다면 인간에게 가까운 사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촌수를 정해 가족 간 사이를 나타낸다. 부모와 자식은 1촌이다. 형제는 2촌이다. 이렇게 적당한 사이를 만들어 관계를 이어나간다.

과거 도량형을 보면 1촌은 1치, 곧 3.3㎝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인 부모와 자식 간에도 적정한 ‘사이’가 있어야 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사이가 무시되면 신문에 오르내리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다.

설날이 다가온다. 모처럼 흩어져 있던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다. 만나는 기쁨도 잠시다. 헤어져 돌아갈 땐 서로가 입힌 상처로 괴로워한다. 가만, 부부끼리는 정작 촌수가 없다. 부부는 사이가 없다고 볼 것이 아니라 특별히 사이가 더 좋아야 한다는 의미리라. 아무리 오랜 부부라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해줘야 한다는 말이다.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음악회의 음악을 가만히 들어보자. 아름답다, 어찌 이리 아름다운가! 그것은 음악 안에서 음과 음이 서로 좋은 사이로 만나기 때문이다.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멀게 그렇게 사이를 두고 흐른다. 바로 하모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음악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가 좋아야 한다. 하모니!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나가야 할 좋은 사이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