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녀 <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중앙대 교수 sung-nyo@hanmail.net >
[한경에세이] 폭염이 준 선물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1주일이 지나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상반기 마지막 공연을 끝내고 1주일의 휴식을 이렇게 보낸 것이다. 그 흔하게 오던 카톡이나 전화도 잠잠했다. 바쁠 때 미뤄둔 집안일과 여러 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막상 시간이 주어지니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저 TV 앞에서 인형처럼 앉아 하루 종일 채널만 돌리는 로봇처럼….

TV로 보는 세상은 불볕더위처럼 뜨겁다. 채널마다 경쟁적으로 보여주는 먹방과 함께 여행프로그램이 주를 이룬다. 가장 핫한 정치 이야기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뉴스도 빼놓을 수 없고, 그 와중에 채널 사이사이 홈쇼핑의 열띤 경쟁은 불이 난 듯하다.

TV 속에 들어앉은 나에게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뮤지컬 ‘아리랑’의 포스터였다. 조정래 선생의 소설 《아리랑》을 뮤지컬로 만든 작품인데 강인한 어머니 ‘감골댁’ 역을 맡아 작년 여름을 연습실과 극장에서 보낸 기억이 났다. 재공연이었으니 2년 전 여름도 마찬가지였을 터이고.

이렇듯 평생 공연을 하며 살아온 나는 휴가를 즐겨 본 적이 없다. 휴가철이나 명절 등 남들이 쉴 때 더 바쁜 직업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고 연극, 뮤지컬, 마당놀이, 방송활동과 함께 교수, 예술감독 등 멀티 플레이어로 살아온 이력 탓이기도 하다.

난 노는 방법도 잘 모른다. 친구를 만나 차 한잔 마시며 수다 떨 줄도 모르고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며 즐겨 본 적도 별로 없다. 늘 피곤하다는 생각에 잠깐이라도 시간이 나면 혼자 TV 앞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것이 유일한 휴식 방법이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내가 걱정됐는지 동생들이 와서 등산을 가자고 성화다. “이 더위에 죽을 일이 있냐”고 뻗대자 “해가 진 뒤 30분이라도 걷자”며 나를 끌어낸다. 평지 같은 산이었지만 심장이 터질 듯하고 땀이 비 오듯 하고 어지럽다 못해 토할 것 같다. 겨우 내려와 진정이 되고 나니 3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가 시원하게 느껴진다. 에어컨에 의지하지 않은 탈(脫)더위가 신기하기도 하고 운동 부족인 내 몸 상태가 심각한 것 같아 덜컥 동생들과 등산모임을 결성하기로 약속을 한다.

무대 밖 인생을 잘 살아야 평생 지켜온 무대 위 인생을 멋지게 마무리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슬며시 가슴에 파고든다. 무대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잘 노는 방법을 찾는 것이 내가 이제부터 해결해야 할 과제다. 체력의 무안함을 만회하기 위해 약속한 산행을 첫 번째 과제로 작심하고 나니 111년 만에 찾아왔다는 최악의 폭염도 그리 무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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