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신뢰, 나의 힘이 아니라 내가 보내는 힘
1700년대 초반, 독일 튀링겐 지방을 무대로 활동하던 음악가가 있었다. 나중에 ‘서양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다. 그는 뛰어난 오르가니스트이자 하프시코드 연주자인 동시에 작곡가였다. 주로 교회음악과 기악곡을 작곡했는데, 무엇보다도 대위법이라는 기법을 잘 구현했다.

대위법은 하나의 독립적인 멜로디에 또 다른 멜로디를 결합시켜 어울리도록 하는 기법이다. 다시 말해 여러 성부가 동시에 노래를 하는데, 각 성부의 멜로디들이 잘 들리면서도 함께 어우러져 음악을 이루도록 한다. 초등학교 때 불렀던 돌림노래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로 시작하는 노래를 여러 그룹이 돌아가면서 함께 부르는데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 기법을 복합적으로 여러 파트가 다양한 선율로 부르도록 만든 당대의 바흐 음악은 놀라운 것이었다. 노래가 진행하는 중에 조성이 바뀌는가 하면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의 성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정교한 음악을 표현하도록 했다.

바흐가 이토록 정교한 음악을 구현한 이유는 음악적 기교를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종교음악가로서의 이상, 즉 신을 향한 경건함을 음악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바흐는 당대에 주목받지 못했다. 1729년 4월,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교회에서 ‘마태 수난곡’이 연주됐다. 바흐 자신은 새로운 음악에 대한 열의와 자신감으로 차 있었겠지만 교회의 자리는 얼마 차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날 자신보다 인기가 있던 작곡가의 곡도 연주됐는데 청중은 여러 선율이 얽힌 바흐의 음악보다 그 작곡가의 좀 더 듣기 편한 음악을 택했다. 그날의 연주는 잘 마쳤고 그걸로 끝이었다.

바흐의 음악이 탄생하고 잊혀진 지 100년이 다 돼 가는 1820년대에 작곡가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의 옛 음악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란 인물의 악보를 발견한다. 그러고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마태 수난곡’이 초연된 지 100년째 되던 해에, (멘델스존의 동료는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려는 멘델스존에게 우려를 보내기도 했지만) 멘델스존은 바흐의 음악을 세상에 다시 알렸다. 바흐가 오늘날 서양음악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게 된 배경이다.

이탈리아 낭만 오페라의 거목 주세페 베르디는 24세 때에 선망의 무대인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 오페라 무대에서 자신의 첫 번째 오페라를 발표한다. 이 작품으로 당시 극장 매니저였던 메렐리의 신뢰를 얻어 이후의 작품도 스칼라 무대에서 발표할 수 있는 행운을 거머쥔다. 하지만 불운한 가정사로 인해 낙담한 베르디는 두 번째 작품에서 재앙 수준의 실패를 맛본 뒤 다시는 오페라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메렐리는 젊은 베르디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그가 다시 오페라를 쓰도록 조력한다. 그저 그런 오페라 작곡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베르디에게 보여준 메렐리의 신뢰는 결국 베르디로 하여금 이탈리아 국가와 맞먹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담긴 ‘나부코’라는 작품을 낳게 했고, 이후 ‘라트라비아타’,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아이다’ 같은 걸작을 배출할 수 있는 힘을 실어줬다.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목적을 가지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그런 친구, 동료, 지인에게 보내는 우리의 신뢰는 어쩌면 세상을 훨씬 의미있게 만드는 행위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행위로 인해 행복한 순간들이 더 많아질 수 있다. 우리 주변을 향해 신뢰를 보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