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최순실보다 더 무서운 '정치판 완장'들
‘완장’을 처단하겠다고 또 다른 ‘완장’들이 설쳐댄다. ‘최순실 게이트’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요즘 일들이 딱 그런 모양새다.

권력을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하고, 기업들까지 후려친 청와대와 최순실 일당의 작태는 매우 악질적인 ‘완장질’이었다. 전모(全貌)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다수 국민이 분노와 상실감에 젖었고, 국정은 마비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국정 최종책임자인 대통령이 ‘게이트’ 당사자가 된 초유의 상황에서 수습과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일은 국회의 몫이 됐다. 비유하자면 중증 환자를 살려내야 하는 의사 역할을 맡았다. 중환자를 받게 된 의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신속하고 적절한 응급처방이다. 그러고는 병의 원인을 찾아내 근본 치료를 해야 한다. 철저한 진단과 처치를 통해 재발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국회와 정치권이 작동하는 모양새가 걱정스럽다. 국정 마비를 막기 위한 응급처방을 찾아보기 어렵고, 도대체 왜 그런 저질의 ‘게이트’가 발생했는지 진중하게 원인을 살피는 모습을 볼 수도 없다. 정당과 정파별로 정치적 유·불리를 셈하고, 정치공작 소재(素材)로 써먹기에 급급한 장면만 가득하다.

‘최순실 게이트’의 전말(顚末)은 ‘권력을 무기로 삼은 완장질’로 요약할 수 있다. 한 줌도 안 되는 무리들이 기업을 겁박해 돈을 뜯어내고, 이권을 편취하고, 인사에까지 끼어들 수 있었던 것은 기업들로 하여금 ‘후환(後患)’을 겁나게 하는 ‘주먹’이 도사리고 있었던 탓이다. 그 환부를 찾아내서 도려내는 게 제대로 된 처방이다.

최순실 일당의 주먹질은 시장경제와 기업활동 영역 곳곳에 정부가 개입하고 규제하게 돼 있는 우리나라의 법제(法制) 위에서 똬리를 틀었다. 사적 경제활동을 형법으로 처벌하는 규제가 누적된 끝에, 기업인의 투자 실패와 같은 경영상 과실에 대해서까지 배임죄로 감옥에 가두는 세상이 됐다. 대기업에 대해서는 입지·고용·투자 등에 갖은 감시와 견제장치를 달아놓은 결과, 중소기업이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는 순간 60개의 규제를 새로 받아야 하는 지경이다. 언제 무슨 일로 꼬투리를 잡혀 범법자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완장’들의 요구를 뿌리치기는 쉽지 않다. 기업들을 이런 ‘처벌의 수렁’ 앞으로 내몬 당사자가 약자 보호와 평등을 앞세워 규제입법을 쏟아내 온 국회다.

그런 국회가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특별위원회를 발족시키면서 청문회 첫날 9개 대기업의 회장들을 가장 먼저 증인석에 세우기로 했다. 최순실 차은택 등 국정농단의 주범들은 뒷전에 뒀다. 문제를 푸는 순서를 거꾸로 하겠다는 얘기다. 국회의원들에게는 청문회 첫날의 ‘흥행’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기업 총수들을 불러내 추궁하고 호통을 치는 모습을 비쳐서, 정치적 존재감을 높이는 게 최고 관심사일 뿐이다. 한 달 전 산업은행 국정감사에서 조양호 한진 회장을 불러내고는 알맹이 없는 질문만 하다 끝낸 국회다. 지난해 정무위원회 국감에서는 신동빈 롯데 회장을 불러다가 “축구 한·일전에 어느 나라를 응원하느냐”는 따위의 함량 미달 질문을 늘어놓기도 했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최순실 게이트’와 같은 국정농단 사건의 재발방지책으로 ‘재벌 개혁’을 강력 추진하겠다는 민주당 등 거야(巨野)의 노골적인 정치공세다. ‘총수 전횡 방지’를 명분으로 내세워 기업 경영의 자율을 옥죄는 방향으로 상법을 개정하고, 미국 영국 등이 앞다퉈 법인세 인하를 통한 투자유치 경쟁에 나선 상황에서 기업을 의인화해 “부자는 증세해야 한다”는 황당한 논리로 법인세를 올리겠다고 나섰다.

‘완장질’의 온상이 된 규제와 속박의 고삐를 더 죄겠다는 국회와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더 큰 완장질’이 어른거리는 이유다. “좋은 먹거리가 생겼다고 신나있지만, 다음에 손볼 곳이 국민의 이름을 빙자해 괴물 권력기관이 된 국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SNS에 올라와 있는 글이다.

이학영 기획조정실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