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꽃이 질 때
꽃의 절정은 낙화(落花) 직전이다. 필 때보다 질 때 더 아름다운 생멸(生滅)의 미학. 바람결에 흩날리는 벚꽃잎을 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든다. 하롱거리는 나비처럼, 쏟아지는 꽃비처럼,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눈사태처럼 비장미의 극점까지 자신을 끌어올렸다가 마지막 순간 불꽃으로 사그라드는 황홀한 정사(情死) 같다.

수만 그루 벚꽃이 연이어 피고지는 일본에서는 더 그렇다. 벚꽃 축제 명소인 나라현의 요시노야마엔 3만 그루 이상이 장관을 이룬다.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등 문학작품에도 자주 나오는 명소다. 이런 곳에서 하이쿠(俳句) 시인들은 벚꽃의 극치미를 노래했다. ‘밤에 핀 벚꽃, 오늘 또한 옛날이 되어버렸네’(잇사), ‘세상은 사흘 못 본 사이의 벚꽃’(료타) 등….

짧은 생을 불사르고 미련 없이 소멸하는 벚꽃은 시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모두가 좋아한다. 그 배면에는 일본 특유의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라는 비애미가 깔려 있다. 사무라이의 절명(絶命) 의식도 함께 배어 있다. 선승 료칸의 ‘지는 벚꽃/ 남은 벚꽃도/ 지는 벚꽃’이라는 시가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 특공대의 주제가로 쓰인 것도 이 때문이리라.

벚꽃만큼 바람에 날려 산화하는 꽃이 매화다.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한 잎 한 잎이 날리며 지는 매화의 죽음은 그래서 풍장(風葬)에 비견되기도 한다. 이렇게 잎이 한 조각씩 떨어지는 것을 갈래꽃이라고 한다. 꽃잎이 서로 붙어 질 때도 한 번에 떨어지는 것은 통꽃이다. 개나리와 철쭉, 무궁화, 나팔꽃, 배꽃, 국화꽃 등이 그렇다. 무궁화는 하루 만에 피었다가 지는데, 펼쳤던 꽃잎을 곱게 말아 오므리고 떨어지는 뒷모습이 단아하다.

지는 꽃이 다 아름다운 건 아니다. 몸채가 큰 꽃일수록 마지막은 처량하다. 목련이 대표적이다. 순백의 육감적인 꽃잎이 누렇게 마른 누더기가 돼 힘없이 떨어질 때 목련은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꽃이 된다. 붉은 흉터를 온몸에 달고 투신하는 동백도 비슷하다. 그나마 동백에는 ‘순간낙화’라는 최후의 비장미가 있긴 하다.

모든 꽃은 피어날 때 이미 질 것을 알고 있다. 꽃이 죽어야 그 자리에서 비로소 열매가 생기기 때문이다. 미당 서정주가 죽기 전 ‘더 없이 아름다운/ 꽃이 질 때는/ 두견새들의 울음소리가/ 바다같이 바다같이/ 깊어만 가느니라’고 노래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바다같이 아름다운 깊이로 더없이 슬프게 지는 꽃의 최후를 두견새 울음소리에 견준 대목이 애달프고도 처연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