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G2시대의 불편한 개막
서울 용산구 원효로4가에 ‘왜명강화지처(倭明講和之處)’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왜국과 명나라가 강화협상을 한 장소라는 뜻이다. 1593년 4월의 일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1년여 뒤의 시점이다. 당시 협상대표는 왜의 제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명의 유격장군 심유경(沈惟敬). 양국이 강화협상에 나선 데는 나름의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개전 석 달여 만에 평양성을 함락시킨 고니시 군은 명의 즉각적인 출병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에 북측의 강추위는 왜군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충무공 이순신의 해상권 장악으로 병참 사정도 말이 아니었다. 전쟁이 없어도 얼어죽거나 굶어죽을 판이었다. 평양성을 탈환하며 파죽지세로 남하했던 명군도 1월26일 벽제관 전투에서의 대패로 전의를 상실했다.

조선을 사이에 둔 기만과 협잡

강화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왜는 한양에서 부산으로, 명은 평양에서 요동으로 각각 철수하기로 했다. 이들에게 유일한 걸림돌은 본국에 대한 보고, 다시 말해 철수명분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아무런 전과도 없는 철수를 용인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고니시는 조선의 남쪽 4개도를 일본이 넘겨받는 것으로 합의가 됐다는 허위 보고를 올렸다. 심유경은 심유경대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중화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이 기다리고 있던 것은 도요토미의 항복문서였다. 그렇게 해서 고니시와 심유경 간에 기묘한 공조체제가 이뤄졌다. 본국을 상대로 한 기만과 협잡이었다. 두 사람이 도요토미에게 보낸 명나라의 사절은 가짜였고 도요토미의 항복문서는 거짓으로 꾸며졌다. 조선은 심유경과 고니시가 이런 작당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피해를 본 것은 조선이었다.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가 극에 달한 도요토미는 2차 출병을 명령했다. 조선반도를 다시 한 번 도탄으로 몰고 간 정유재란(1597년)이었다.

긴박한 한반도…우리의 선택은

이제 이 비극적인 역사를 돌아보는 이유는 최근 한반도 주변의 군사·안보 정세가 우리가 미처 통제할 틈도 없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기습적인 항공식별구역(ADIZ) 선포로 촉발된 지정학적 긴장은 기존 중·일 분쟁, 한·일 갈등, 남북 간 긴장이 중첩적으로 맞물리면서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복잡성을 보이고 있다. 이 민감한 시기에 일본-중국-한국을 순차적으로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은 태평양 세력의 최대 주주 자리를 내놓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하는 것은 좋은 베팅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했다. 주요 2개국(G2)의 일원임을 자처하고 있는 중국이 미국의 이 같은 경고사격을 얼마나 민감하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공교롭게도 두 나라는 다자간 통상체제 구축을 놓고도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이 아시아 16개 국가들과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체결에 나선 가운데 미국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결성으로 맞불을 놓고 있다. 정치적 또는 경제적으로 주변국들에 대한 줄세우기 경쟁을 시킬 수도 있는 상황이다. G2시대는 이렇게 불편하게 도래하고 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시점이다.

조일훈 경제부장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