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실종된 영구채, 귀막은 금감원
A증권사 채권발행부장은 “기업들의 영구채 발행이 8월부터 갑자기 중단됐다”며 답답해 했다. 영구채(신종자본증권)는 ‘주식 성격을 갖고 있는 채권’이다. 금리는 일반 회사채보다 높지만 회사가 임의로 만기를 늦추거나 이자 지급을 연기·취소할 수 있어 회계상 자본으로 처리한다. 국내에선 2003년부터 은행만 발행하다가 작년 4월 상법 개정으로 일반 기업들도 발행할 수 있게 됐다. 포스코 SK텔레콤 등 7~8개 기업들이 채권을 발행하고도 부채비율을 낮출 수 있는 효과를 겨냥해 총 3조원 안팎의 영구채를 발행하는 등 새 자금조달원으로 빠르게 자리잡는 듯했다.
'규정 공백'이 부른 시장 실패
그런데 지난달부터 갑자기 발행이 뚝 끊겼다. 금융감독원과 회계기준원이 지난 7월 하순 투자자 질의에 대해 “영구채를 ‘채무상품(채권 등)’이 아닌 ‘지분상품(주식 등)’으로 회계처리해야 한다”고 판정한 게 계기가 됐다. 영구채 최대 투자처인 보험사들은 그동안 이를 ‘채권’으로 회계처리해 왔다. 하지만 이번 결정으로 올 6월 결산부터 ‘비상장 주식’에 준하는 금융상품으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감독규정 공백’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금감원의 위험기준자기자본(RBC) 관련 감독규정엔 보험사 자산이 ‘현금·예치금, 채권, 주식, 대출, 재보험자산, 부동산’으로만 분류될 뿐 영구채는 없다. 이 분류상 ‘지분상품으로 결론 난’ 영구채와 가장 비슷한 자산은 ‘비상장 주식’이다.
이로 인해 보험사들은 지난 6월 말 RBC 비율 산정 때 악영향을 받았다. 영구채 투자 관련 위험가중치가 높아져서다. 영구채 1000억원을 투자한 보험사는 채권으로 처리할 때는 위험가중치로 20억원(신용위험계수 2%, AA급 기준)만 반영해도 되지만, 비상장 주식은 6배 수준인 120억원(신용위험계수 12%)을 잡아야 한다. 지난 5~6월 금리 폭등에 따른 채권 손실로 RBC 비율이 급락한 보험업계로서는 설상가상이었다. 한 보험사 투자담당 임원은 “국고채보다 0.5~1.5%포인트 높은 금리를 받자고 ‘비상장 주식’처럼 취급받는 영구채에 누가 투자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시장 목소리 외면하는 금감원
금감원 관계자는 “적정 투자위험을 감안해 영구채 신용위험계수를 채권(2%)과 주식(12%) 사이에서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 증권사 투자은행(IB) 담당 임원은 “뒤늦게 외양간을 고치는 꼴”이라며 “왜 선제적으로 제도와 규정을 정비하지 않았는지 아쉽다”고 했다.
비슷한 일은 지난봄에도 있었다. 금감원은 지난 3월 보험사의 사모펀드(PEF) 등 대체투자 평가손익을 분기마다 손익계산서에 반영하도록 했다. 보험사들이 “회사 전체 손익이 왜곡된다”며 “대체투자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반발했지만 묵살했다. 지난 5월 한국경제신문이 주최한 ‘2013 한국 대체투자 서밋(ASK)’에서 이 문제가 공론화되자 금감원은 다음날 “PEF는 손실처리 항목에서 제외하는 등 제도 개선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보험사가 반발할 때 왜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빠른 조치였다.
감독당국이 새 제도와 규제를 도입하는 건 자본시장에 큰 영향을 준다. 때로는 부작용이 나타나면서 ‘거래 절벽’ 현상이 벌어지곤 한다. 시장 작동을 원활하게 유지하면서도 비효율과 문제점은 선제적으로 도려내는 치밀한 ‘포정해우(丁解牛) 금융감독’이 필요한 때다. 그러기 위해선 감독 당국이 시장 목소리에 귀를 더 열어야 한다.
이상열 증권부 차장 mustaf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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