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들 중에는 의외로 박정희 대통령 시절을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군사정권의 "철권통치"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개발연대에 누렸던 각종 특혜와 초고속 성장에 대한 미련도 아니다. 그들은 대통령이 기업인들의 목소리에 좀 더 귀기울여주길 기대하며 3공 때의 기억을 끄집어 낸다.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얼마전 연암축산원예대학을 방문한 한국경제신문 기자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취한 "8.3 조치"를 예로 들었다. "은행 돈이 모자라 기업들이 울며겨자먹기로 연리 15~20% 짜리 사채를 끌어다 쓸 때야.기업들의 아우성에 견디다 못한 김용완 당시 전경련 회장이 죽을 각오로 "박통(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갔어.기업들이 처한 상황을 상세히 설명한 뒤 대책을 요구했어.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8.3 사채동결조치야.박통이 다른 건 몰라도 기업들의 사기는 많이 북돋워줬는데.." 8.3 사채동결 조치는 자본주의의 기본을 무시한 초법적 결정이라는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기업들의 중화학 투자를 촉발시켜 한국 경제의 기틀을 닦는데 크게 기여했다. 국가 최고지도자가 기업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국가경제의 중심축인 기업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 지,어떤 곤란을 당하고 있는 지를 파악하지 않고는 경제의 중장기 비전을 짜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일 자체가 가능하지 않으니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6개월을 되돌아 보면서 구 명예회장의 "박통 시절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건 노 대통령이 기업인들의 얘기를 듣는데 그만큼 소홀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대기업 CEO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은 "단절" 상태로 느껴질 정도다. 노 대통령이 대기업 CEO들을 만난 것은 사실 몇 차례 되지 않는다. 재벌 총수들이 노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동행했고 노 대통령이 순방 직후 답례 차원에서 시내 한 삼계탕집으로 이들을 초대해 짧은 점심을 했을 뿐이다.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관련 행사에도 대기업 총수들이 초청됐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다. 대기업 총수들과는 진솔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사실상 없었다는 얘기다. 재계 일각에서 대통령이 기업 총수들을 독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개적으로 나왔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그 요구를 외면한 채 시국선언 형태의 건의문을 발표한 전문경영인 단체 멤버들을 만났다. 지난 22일 청와대에서 열린 "차세대 성장동력 추진 보고대회"도 마찬가지다. 이 회의에도 의례적으로 불려가는 경제5단체장들을 제외하곤 대기업 회장들이 앉을 자리는 없었다. 한국이 향후 10년간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를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에 산업을 현장에서 지휘하고 있는 대기업 CEO들이 제외됐다면 그 회의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국내 민간 투자의 약 70%를 10대 그룹이 맡고 있다. 이들이 활기차게 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투자가 되고 고용도 늘어난다. 대기업을 개혁의 대상으로만 여겨서는 이들의 역할도 기대할 수 없다. 기업들이 어떤 고충을 겪고 있는 지,어떤 미래를 구상하고 있는 지를 대통령이 직접 들어야 한다. 남의 입을 통해 듣는 얘기는 정확하지 않다. 적어도 10대,15대 그룹 총수는 개별적으로 만나 그들의 고충과 아이디어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기업들이 해외로 거점을 옮기면서 산업공동화 현상이 심각한 문제도 대두되고 있다. 이 땅에 남아 경쟁하고 살아남겠다는 기업가가 왜 점차 사라지고 있는 지,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김정호 대기업팀장 j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