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가 참 이상해 보이는 결의를 했다. 지난 주말 열린 정기총회에서 부당한 정치자금은 내지 않겠다는 선언문을 채택한 것이다. 부당한 것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거늘 총회에서 결의까지 했다니 한국인이 아니라면 선뜻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다. 전경련이 이런 선언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지난 1992년 유창순 당시 회장이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경제단체가 돈을 모으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최종현 SK회장도 93년 취임때 "비공식적인 정치자금을 걷지 않겠다"고 천명했었다. 그렇지만 과거의 선언은 말 그대로 '선언'에 그쳤던 모양이다. 이번에 또 이런 선언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기업들이 정치자금을 내놓으라는 압력에 견디지 못해왔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실 재계에서는 선거 때만 되면 "어느 기업이 얼마를 냈다더라" "어떤 기업의 사장실에 갔더니 이름만 대면 아는 정치인이 와 있더라"는 식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떠돌아왔다. 심지어는 "선거철이 되면 재계총수들은 자리를 비우는 게 상책"이란 말까지 공공연히 나돌았고 실제 그리 행동한 총수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업들이 불투명한 정치자금을 내놓는 것은 사실 보통 문제가 아니다. 확대재생산을 위한 투자 재원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온갖 비리의 온상이 된다. 요즘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각종 게이트들에는 거의 예외없이 굵직한 정치인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대선자금 불법모금 혐의를 받고 있는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은 미국법원에서 신병 인도 문제가 논의되는 등 나라 전체가 국제적 망신도 당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기업들이 세금 바치듯 내는 정치자금도 따지고 보면 근로자들이 밤새워 일한 땀의 결실이란 점이다. 구조조정의 와중에서 밀려난 퇴직근로자들,대학을 졸업하고도 회사 문턱에도 들어가 보지 못한 많은 청년실업자들의 눈물까지도 농축돼 있다. 이런 돈이 부당한 방법으로 사용처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번 선언이 과거 선언의 재판이 될는지도 알 수 없지만 일단 기대는 걸어볼 만한 것 같다. 재계가 이번엔 '작심'을 하고 나선 듯하기 때문이다. 우선 전경련이 정기총회라는 자리에까지 이런 결의를 올리고 회원들이 기립박수로 추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게다가 '감히' 정치인들로 하여금 과거 비리를 고해성사토록 하자는 제안까지 내놓았다. 고백한 과거 잘못은 용서해주고 앞으로의 비리는 엄단하자는 제안이다. 정부측 자세도 과거보다는 한단계 진전돼 있다. 진념 부총리는 전경련의 선언에 대해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고 공감을 표하면서 "정부도 기업들이 본연의 업무에 전념할 수 있게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와 관련해 법인세의 1%를 정치자금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논란의 여지는 많지만 자금원을 투명화하려는 의지는 살 만하다. 그러나 보다 긴요한 것은 정치인들이 기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의식을 바꾸는 일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선거철만 되면 표를 따내기 위해 기업을 제물로 삼는 경우가 허다하다. 근로자들을 쥐어짜거나 부정직한 방법으로 기업만 살쪘다는 주장을 펴 기업이나 기업가들을 파렴치범으로 만들곤 한다. 틈만나면 자기 나라,자기 지역 산업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외국 정치인들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국민을 잘 살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글로벌 경쟁시대에서 국민을 잘 살게 하는 것은 바로 기업이 잘 되게 만드는 일에서 비롯된다. 일선에서 세계와 경쟁하면서 나라와 국민을 떠받치는 것이 바로 기업이기 때문이다. 선거의 해를 맞아 '기업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이란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해 두고 싶다. b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