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랑 < 대한교과서 대표이사 trhwang@deahane.com > '고지식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융통성이 부족한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비슷한 의미로 너무 '교과서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런 말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그렇다면 고지식하지 않고 융통성이 많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올바른 사람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융통성은 관계를 원활히 하는 윤활유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융통성은 다분히 임의적이고 한계기준이 없기 때문에 한발 물러선 발걸음은 두번 세번 물러설 수 있다는데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부정적인 일들은 지나친 융통성에서 기인하는 게 많다. 약속된 원칙을 지키지 않고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때 그 결과에 대해 동의를 구하기는 어렵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개인적인 판단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사기꾼,거짓말쟁이,부정부패를 저지른 사람도 자기 변명거리는 가지고 있다. 자기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우기기도 한다. 각자 다른 시각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원칙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긍정'이 아니라 '부정'이 되는 것이다. '교과서'라는 말에는 '원칙'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최소한의 원칙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교과서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교과서'처럼 살지 않아야 마치 제대로 사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사회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도 한다. 과연 학교에서 배운 것이 잘못된 것일까. 현실 속에서 원칙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교과서가 부정될 수는 없다. 오랫동안 교과서를 만드는 회사에 근무하다 보니 친구들이 가끔씩 '교과서'같은 사람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친구들이 그 말 속에 약간의 부정적 견해를 넣었다해도 개의치 않으려고 노력한다. 순간순간의 판단에 따른 융통성을 발휘하기 보다 '원칙'에 충실하고 싶기 때문이다. '교과서같은 사람'.교과서를 만드는 회사를 떠난 후에도 계속 듣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