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을 해본다.

일곱 살 난 내 아이가 북쪽의 또래를 만난다면 어떤 얘기를 나눌 것인가.

백쉰한 가지나 되는 포켓 몬스터들을 좔좔 외우며, 내가 열일곱 살이 돼서야 조심스레 입밖에 내놨던, "우리들은 어른들과 달라요!"를 벌써부터 외쳐대는 내 아이가 북의 동무를 만난다면 말이다.

남쪽 평야지대에서 태어나 줄곧 한강 이남에서 자란 연고로, 그리고 반공 교육이 극에 달했던 70년대 중반부터 제도 교육에 맡겨진 탓에, 나는 당시의 국가가 이끄는 대로 너무나 모범적으로 북쪽에 대한 편견을 습득하며 자랐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대낮에 간첩이라는 말만 들어도 엄마 치마 끈을 부여잡고 놓지 않는 순진한 학생이었다.

민주화 학생 운동을 뒤로 하고 대학문을 나설 때까지, 그리고 결혼 적령기에 이르도록, 나는 장차 북쪽 출신의 자제와 결혼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게다가 그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아무리 이산가족찾기 열풍으로 연일 TV 화면이 눈물바다로 변해도 나를 포함한 비실향민 가족들에게 북쪽이란 외국보다 낯선 나라였고, 이산의 슬픔은 TV 화면 속에 한정돼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혼 전의 일이었다.

오래전부터 나는 결혼을 하게 되면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남편의 아버지한테 내 아버지인 양 "아버지"하고 불러보는 것이었다.

너무 일찍 아버지를 여읜 것이 억울하고 한이 돼 나는 새 아버지를 얻는 심정으로 시아버지를 만나고 싶었다.

그동안 못 받은 사랑도 두 배로 듬뿍 받고 싶었다.

그리 큰 욕심은 아니었는데, 운이 없게도 내가 결혼을 결심한 사람의 아버지, 곧 나의 시아버지는 이미 10년 전 세상을 뜨고 안 계셨다.

안타까웠지만, 아버지가 안계시다는 이유로 결혼을 파기할 수는 없었다.

오래 품어온 의중을 내색한 적이 없는데, 남편이란 사람은 말로 보상이라도 하듯 끔찍하게 아버지 얘기를 하고 또 썼다.

어쩌다 밥상에 꽁치가 올라오게 되면 아버지 얘기를 한 바구니 풀어냈고, 공원의 풀빵이나 아이스크림 장사를 보게 되면 또 아버지 얘기가 한바구니였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단 한가지도 없는 나는 그의 아버지 얘기를 중간에 자른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마음 편히 재미있게 듣고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가 아버지에게 빚진 것이 얼마나 많고 깊은지를, 또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진 빚이 어떠한 것인지를.

나의 시아버님은 전쟁 통에 북쪽에 부모와 아내, 그리고 핏덩이 아들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남쪽에 발이 묶인 실향민이었다.

이 세상에서의 그리움과 죄책감을 저 세상까지 멍에로 메고 간 분이었다.

그런 분의 등을 바라보며 살았을 남편과 그 가족들의 세월을 내가 헤아린들 그들의 발뒤꿈치 그림자에나 닿을 것인가.

아니 내 아이는 장차 자기의 뿌리에까지 내려와 있는 슬픈 역사를 얼마만큼이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얼굴도 모르는 시아버님의 제사를 7년째 지내 오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아이 속에서 그분의 존재를 찾는다.

허공으로 피어 오르다가 갸웃이 코 끝까지 전해오는 향불 연기를 맡다가 문득 저 북녘 땅 어딘가에 살고 있을 내 아이의 피붙이들로 생각이 미친다.

아이가 겁없이 밥알을 남길 때, 철없이 넘치는 생활의 호강을 투정할 때, 어김없이 내 의식의 저편을 흐르는 그림자들.

그쪽엔 내 아이 또래가 몇이나 될까.

그애들은 주머니 속에 쏘옥 들어가는 작고 귀여운 괴물들을 보면 내 아이처럼 "우리들만의 세상"이라며 어른인 나를 따돌릴까?

그래, 남과 북의 일곱살 개구쟁이들이 만나면 어떤 얘기를 나눌까.

남북 정상 회담을 이틀 앞두고 거듭 드는 생각이다.

두 정상의 만남 자체가,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수많은 현안들이 그날의 결과를 사이에 놓고 의미 부여를 기다리고 있다.

동족 전쟁은 다시 없게 할 것을 필두로, 이산 가족 문제, 군사 문제, 경협 문제, 그에 따른 통신.교통 문제, 동질감, 위화감 문제, 문제 문제...

그러는 중에도 아이들은 자란다.

기성 세대로서는 뛰어넘기 힘든 그 모든 단절의 골을 해소시키는 지름길은 어쩌면 남북 어린이들간의 소통에 있는지도 모른다.

ji298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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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

<>이화여대 불문과 졸업
<>소설집 "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밤은 말한다" "동행" "당신의 물고기" 장편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