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보다 나은 속편, 3편부턴 '글쎄'.

지난 2월 14일 개관한 강릉 솔올미술관의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시작은 화려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89)가 세운 마이어파트너스가 미술관 건물을 설계했고, 개관전으로 공간예술의 거장 루치오 폰타나(1899~1968)의 개인전을 열었다. '강릉의 랜드마크'를 꿈꾸며 출범한 이곳은 단번에 미술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강원도 강릉 솔올미술관 외관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
강원도 강릉 솔올미술관 외관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
떠들썩한 오프닝에 비해 성과는 기대 이하였다. 솔올미술관이 '1편'으로 내놓은 루치오 폰타나 개인전은 2만7000여명의 발길을 끄는 데 그쳤다. 연면적 약 3200㎡(968평) 전시장을 채우기에 턱없이 부족한 작품 수, 덜 정비된 주변 환경 등이 약점으로 지목됐다. 미술계에선 '첫 단추부터 꼬였다'며 다음 열릴 전시를 걱정 섞인 시선으로 지켜봤다.

▶▶▶(관련 기사) '강릉 랜드마크'라던 솔올미술관, 김 빠진 루치오 폰타나 개관전

지난 5월 4일 열린 솔올미술관의 두 번째 전시 '아그네스 마틴: 완벽한 순간들'은 그간의 우려를 누그러뜨리기 충분했다. 전시 내용과 구성면에서 전편에 비해 높은 완성도를 보여줬다. 미국 추상표현주의 거장 아그네스 마틴(1912~2004)의 대표작 54점을 총망라한 대규모로 조성된 데다, 그의 모노크롬 회화 연작은 순백의 미술관 건물과도 한 몸처럼 어우러졌다. 함께 열린 정상화 작가(91)의 개인전도 마틴의 존재감에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균형 있게 구성됐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오는 8월 막을 내리는 이번 전시 이후 미술관을 운영해야 할 강릉시가 공식적으로 밝힌 운영 계획이 아직 없다. 솔올미술관이 '강릉의 랜드마크'로서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 불투명한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미술계의 관심이 쏠린 이곳의 상황을 아그네스 마틴과 정상화, 강릉시 세 가지 키워드로 살펴봤다.

7년간 사라진 '고독의 화가' 아그네스 마틴

마틴은 미국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가운데 한명이다. 쿠사마 야요이, 조안 미첼, 루이스 부르주아 등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여성 작가' 중 하나로도 꼽힌다. 그동안 아트페어에서 띄엄띄엄 마틴을 만난 사람이라면 이번이 그의 국내 첫 개인전이란 점만으로도 가볼 만한 전시다.
강릉 솔올미술관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전시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
강릉 솔올미술관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전시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
마틴의 추상화는 자세히 들여다봐야 진가가 드러난다. 멀리서 보면 새하얀 화면에 불과하다. 가까이 서면 격자처럼 수 놓인 선이 보인다. 더 자세히 들어가면 미세한 손 떨림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의 단색화 거장 김환기, 박서보의 작품을 떠올릴 만하다. 동양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그의 그림은 "극도로 단순화되고 반복적인 몸짓으로 정신적인 울림을 선사한다"고 평가받는다.

"나는 미니멀리즘이 아닌 추상표현주의 화가다." 생전 마틴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현대 회화에서 미니멀리즘은 감정이나 기교를 전부 덜어내는 사조를 뜻한다. 반면 추상표현주의는 작가의 감정을 강조한다.

마틴이 자신을 이처럼 규정한 배경을 이해하려면 그의 일생을 관통한 외로운 감정을 살펴보는 편이 좋다. 마틴은 철저히 혼자였다. 1912년 캐나다 시골 농장에서 태어나 엄하고 금욕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부모의 냉대 속에 수영선수, 교사 등 여러 샛길을 걸었다. 그러던 중 뉴멕시코의 광활한 사막에 경외심을 느끼곤 미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아그네스 마틴, '나무', 1964, 캔버스에 아크릴, 연필, 1905 x 1905 cm, 리움미술관 © Estate of Agnes Martin  Artists Rights Society (ARS) /솔올미술관 제공
아그네스 마틴, '나무', 1964, 캔버스에 아크릴, 연필, 1905 x 1905 cm, 리움미술관 © Estate of Agnes Martin Artists Rights Society (ARS) /솔올미술관 제공
전시는 마틴이 본격적으로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한 1955년 무렵부터 돌아본다. 마틴은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사상가 스즈키 다이세쓰를 만나며 동양의 선(禪)과 노장사상을 배웠다. 동그라미 세모 등 기하학적 도형을 묘사하던 그의 회화는 갈수록 단순해졌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나무'(1964)에 이르자 모든 걸 약분하는 듯한 격자무늬 패턴만 남았다.

블루칩 작가로 명성을 쌓던 마틴은 50대에 돌연 자취를 감췄다. 주변의 무관심과 외로움으로 점철됐던 어린 시절 후유증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편집성 조현병을 진단받고 매일 환청에 시달렸다. 유일한 멘토였던 화가 에드 라인하르트마저 세상을 떠났다. 1967년부터 1974년까지 7년간 아무도 없는 사막과 숲으로 들어가 잠적했다. 대부분 시간 붓을 놓고 명상하며 보냈다.
강릉 솔올미술관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전시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
강릉 솔올미술관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전시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
전시의 두 번째 섹션은 은둔 생활을 겪은 뒤 완숙한 마틴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다. 명상을 통해 가장 순수한 정신적 상태를 예술로 옮긴 회색 모노크롬 8점이 걸렸다. 생명을 의미하는 흰색과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색의 중간인 회색에서 작가의 내적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아쉽게도 이 시기 작품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조금이라도 균형이 흐트러진 작품은 작가가 파괴했기 때문이다.

전시의 백미는 3층 구석에 숨어있는 8점의 '순수한 사랑' 시리즈다. 마틴이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몰입했던 작업이다. 1993년 건강상의 이유로 양로원에서 지낸 그는 매일 작업실을 찾았다. 몸이 쇠약해지며 작품 크기가 줄어든 대신 분위기는 한껏 화사해졌다. 노랑과 하늘, 연분홍 등 파스텔 톤의 은은한 색으로 캔버스를 채우기 시작했다.
강릉 솔올미술관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전시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
강릉 솔올미술관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전시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
인생 황혼기에 이르러 비로소 세상과 화해한 걸까. '사랑', '충만', '아기들이 오는 곳' 등 긍정적인 감정을 담은 1999년 작품의 제목들이 이를 암시한다. 회색 모노크롬 작품들과 달리 반투명한 광채와 기쁨, 삶에 대한 예찬이 담긴 연작을 남긴 마틴은 그로부터 5년 뒤인 2004년 세상을 떠났다.

인고의 세월 끝 완성된 정상화의 '백색추상'

마틴의 전시와 함께 열린 정상화 작가의 개인전 '인 다이얼로그: 정상화'도 주목할 만하다. 인 다이얼로그는 솔올미술관이 세계미술과 한국미술을 연결하기 위해 기획한 전시 프로젝트다. 마틴이 순수한 정신성을 절제된 양식으로 표현할 무렵, 한국에선 전위적인 실험미술과 함께 '수행'을 강조한 단색조 추상회화가 태동했다.
솔올미술관 '인 다이얼로그: 정상화' 전시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
솔올미술관 '인 다이얼로그: 정상화' 전시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는 작가의 대표작인 '백색추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기나긴 인고의 세월 끝에 완성되는 것이 작품의 특징이다. 캔버스에 순백의 고령토를 덮어 바른다. 꾸덕꾸덕해진 캔버스를 가로세로 주름잡듯 접고 꺾는다. 금이 간 자리를 뜯어내고 아크릴 물감을 채운다. 일련의 과정을 거친 뒤 완벽한 조화와 균형, 형태에 다다르면 작가의 손이 멈춘다.

정상화 작가가 자신의 창작행위를 두고 '일'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가로세로 격자무늬만 남은 회화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기란 쉽지 않다. 작가 본인이 의도한 결과다. 그의 작품은 특정한 '이야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드러내고 메우는 반복적인 작업, 즉 '일'로서의 과정 자체에 집중한다.
정상화 '무제 017-10-25', 2017, 캔버스에 아크릴, 고령토, 2273 x 1818 cm © 정상화 /갤러리현대 제공
정상화 '무제 017-10-25', 2017, 캔버스에 아크릴, 고령토, 2273 x 1818 cm © 정상화 /갤러리현대 제공
마틴이 고독한 인생을 살아왔듯, 정상화의 생애도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이 관통했다. 작가는 대학을 졸업한 뒤로부터 줄곧 미술계의 '이방인'을 자처했다. 기존 회화의 틀과 형식을 과감하게 깨뜨린 미술실험에 몰두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1967년 프랑스 파리, 1969년 일본 고베로 거처를 옮긴 끝에 지금의 단색조 추상회화에 정착했다.

작가의 배경을 알고 보면 백색추상을 한층 깊이 음미할 수 있다. 격자로 나뉜 캔버스는 결국 하나의 공간으로 연결된다. 세월을 간직한 고령토가 떨어져 나간 곳은 새로운 물질이 채운다. 한국과 프랑스, 일본 등 서로 다른 공간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남들과는 다른' 작품세계를 개척하려던 작가의 정신이 반영된 결과다.
솔올미술관 '인 다이얼로그: 정상화' 전시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
솔올미술관 '인 다이얼로그: 정상화' 전시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
전시 구성 측면에서도 지난 개관전에 비해 한층 균형 잡힌 모양새다. 지난 전시에선 '공간예술'을 주제로 루치오 폰타나와 곽인식 작가를 연결했는데, 곽인식의 작품은 2층 구석의 작은 전시장 한 곳에 걸리는 데 그쳤다. 곽인식의 미술사적 중요성에 비해 다소 겉도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1층을 오롯이 정상화한테 내어줬다. 2층에서 열린 마틴 전시의 여운을 간직한 채 정상화의 작품을 만끽하기에 알맞은 규모다.

미래 청사진 없는 강릉시, '3편'부턴 안갯속

1편보다 발전한 속편을 내놨지만, 솔올미술관의 그다음 행보는 안갯속이다. '기부채납'이라는 미술관의 독특한 출발이 한몫했다. 지금까지 미술관을 설계하고 전시를 마련한 주체는 건설 시행사 교동파크홀딩스였다. 강릉시 소유 부지에 아파트를 짓는 대가로 그 옆에 미술관을 조성해 시에 기부채납하기로 한 것이다. 미술관 위탁 운영을 맡은 한국근현대미술재단의 역할은 이번 전시로 끝난다.
강원도 강릉 솔올미술관 외관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
강원도 강릉 솔올미술관 외관 전경 /솔올미술관 제공
문제는 앞으로 미술관을 운영해야 할 강릉시가 뚜렷한 미래 청사진을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강릉시 관계자는 3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오는 8월 한국근현대미술재단이 위탁운영을 끝낸 뒤 연말부터 강릉시립미술관 본관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어 "미술관 운영 기본 계획은 있지만, 오는 12월 내년도 정부 예산안이 확정된 뒤에야 예산과 인력 등 세부 계획을 세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아그네스 마틴처럼 유명 작가의 전시를 기획하려면 통상 1~2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김석모 솔올미술관장은 "마틴의 전시를 열기 위해 지난 3년간 공들여 준비했다"며 "리움미술관,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 뉴욕 휘트니미술관 등 마틴의 작품을 소장한 국내외 기관들과 오랜 시간 협의한 결과"라고 말했다. 강릉시로부터 향후 미술관 운영계획에 대해 공유받은 내용이 있냐는 질문에는 "전혀 없다"고 일축했다.

이번 전시를 두고 '당분간 솔올미술관에서 볼만한 마지막 전시'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솔올미술관이 강릉의 랜드마크로 거듭날 수 있을까. 화려하게 데뷔한 미술관은 8월 25일까지 열리는 아그네스 마틴과 정상화의 개인전을 끝으로 기약 없는 휴식기에 돌입한다.

강릉=안시욱 기자